베토벤의 ‘교향곡 제5번 C 단조 작품번호 67’, 정식 명칭은 이렇지만, 보통 ‘운명’이란 별칭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 운명이 문을 두드린다는 벽두의 소리 몇 마디를 듣고 가슴 설레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저 많은 교향곡들 중에서, 전형적인 교향곡 하나를 뽑으라면 우선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이 곡이다. 베토벤 음악의 높이와 크기는 말로 다 나타낼 수가 없다.
그런데 ‘운명’의 유사어(類似語)로서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숙명’이란 말이다. ‘운명’과 ‘숙명’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운명’이 인간적인데 비해 ‘숙명’은 더욱 냉엄하고 무자비하다. 운명에는 우리의 자유의지의 날이 먹혀들어가지만 숙명은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예컨대 나는 왜 21세기에 지구에 태어났으며, 생일이 3월이고 성은 왜 성가인가? 이런 일들은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가 없다. 처음부터 우리의 능력 밖의 일이어서 체념과 수용 이외엔 대응할 방법이 없고, 또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그런데 운명의 경우에는 운명이 우리의 삶을 일방적으로 제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운명은 우리 삶에 간섭을 하고 우리의 자유의지는 용감하게 운명에 대항한다. 이 과정은 처절한 투쟁의 양상이다.
베토벤은 절망과 자살의 위기를 극복하며 운명을 휘어잡아 인생이란 한 커다란 드라마를 완성했다.
물질계에서는 사건의 진행은 엄격히 인과율의 법칙에 따른다. 원인과 결과의 역학(力學)관계가 법칙의 틀이다. 반면에 분방하게 분출하는 생명력은 그리고 그 생명력의 주권자(主權者)인 자유의지는 문자 그대로 자유 그 자체다. 동으로 가겠다면 동으로 가는 것이고 서로 가겠다면 서로 가는 것이다. 이유가 따로 없다. 자유의지의 행사자(行使者)라는 점만으로도 생명은 신비다.
운명이건 숙명이건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서 특정한 시공(時空) 안에서 살다가 죽는다. 그리고 그 동안에 누구나 그 사람 아닌 딴 사람은 절대 불가능한 독자적인 시나리오에 의한 독자적인 연기로써 한 편의 장대한 드라마를 연출한다. 여기에서 예외적인 사람은 동서고금 한 사람도 없다. 좋든 싫든 한 편의 드라마를 완성하고 떠난다. 동시에 미완성(未完成)의 드라마도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죽음과 동시에 어떠한 ‘작품’도 평범하건 천재적이건 간에, 담담하건 감동적이건 간에 완결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바로 이 점에 착안했다. 본인이 의식을 하고 있든 그렇지 않든, 동의를 하든 않든 누구나가 장편 예술 작품 한 편을 남기고 떠나게 돼 있는 것이 우리의 숙명이다.
이 작품은 살아서 사람이 세상에 발표하는 어떠한 작품과도 비교를 절(絶)한다. 이 작품은 연극이기도 하고 시이기도 하고 소설이기도 하고 영화이기도 하고 음악이기도 하고, 미술이기도 하고 평론이기도 하고 수필이기도 하고 스릴 만점의 모험담이기도 하고 최고의 추상 예술이기도 하다. 이런 모든 예술의 요소들이 용광로에서처럼 융합된 거대한 규모의 작품이다. 이 작품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분은 존재를 다스리시는 분 오직 한 분뿐이시다.
평생을 옳게 산다면…. 물론 이것은 참 좋은 일인데, 강력한 윤리의식이 필요하고, 그만큼 힘이 든다. 반면에 내 인생을 되도록 아름답게 때가 묻지 않게 가꾸어나가기로 마음먹는다면…. 이것은 의무감에서 노력하는 경우보다도 즐겁고 재미있게 열중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인생을 윤리의식 대신에 심미의식과 결합시키는 것이다. 이런 방법을 수긍하시는 분이 그리 적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제 성실하게 살아온 어떤 영혼이 인생의 피날레를 장식할 때가 가까워지고 있다. 평생 가꾸어온 자기만의 예술 작품을 하느님께 봉헌하려는 기쁜 시각이다. 한국복자수도회를 창설하신 무아 방유룡 안드레아 신부님이 ‘참으로 복되도다 성인의 죽음이여…’ 하시던 말씀이 지금도 귓가에 낭랑하게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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