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일 9·11테러를 주도한 오사마 빈 라덴이 미군 특수요원들에 의해 최후를 맞았다. 그의 사망에 대해 미국은 마치 ‘적 그리스도(antichristi)’가 제거된 듯 크게 환호하였으며, 오바마 대통령은 “이제 정의가 실현됐다”는 의미를 부여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여러 언론매체들도 마치 어둠이 빛을 이긴 적이 없다는 듯 흥분을 감추지 못하였다. 이러한 분위기는 빈 라덴의 죽음에 관한 교황청의 논평을 무색하게 만든 듯하다. 페데리코 롬바르디 신부는 무엇보다 빈 라덴이 종교를 이용해 많은 이들을 희생시키고 갈라놓은 것은 사실이고 이에 대한 분명한 책임이 남아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죽음 앞에 결코 환호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아울러 대변인은 하느님 앞에서 빈 라덴이 짊어져야 할 책임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은 깊이 숙고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사실 빈 라덴의 존재는 이슬람교 자체가 테러리스트의 온상인 것처럼 많은 이들에게 오해를 준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에 어떤 이들은 중세의 십자군 전쟁을 떠올리면서 그리스도교의 성전(聖戰)으로 이슬람교와의 관계를 주장하기도 했다. 미국 싱크탱크 퓨리서치센터의 연구프로젝트인 퓨(PEW) 포럼은 지난 1월 『세계 무슬림 인구의 미래』 보고서에서 2010년 현재 전 세계 무슬림이 세계 인구의 23%에 달하는 16억1931만 명이라고 밝혔다.
이 숫자를 보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된다. 빈 라덴으로 인해 이슬람교를 그토록 사악한 종교로 간주할 수 있는가? 무슬림이라는 이유로 다른 종교를 갖고 있는 이들에게 비인격적인 대우를 받아야 하는가? 얼마 전 무슬림이 된 윤 알리야에 대한 한 일간지 기사를 읽으면서, 한국 내에서 자행되는 비인간적 행위에 대해 충격을 받았다. 특별히 “같은 한국 사람인데 … 경멸의 눈빛은 정말 견딜 수 없어요.”라는 부분에선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하였다.
기사에 따르면, 현재 13만∼14만 명의 무슬림이 한국에 살고 있으며, 이 가운데 적어도 4만5000여 명은 한국인이다. 과연 이들 모두가 “테러리스트가 어딜 나와?”라는 말을 들어야만 하는지 묻고 싶다. 물론 그 어떤 이유로든 또 어떤 상황에서든 테러는 용납될 수 없다. 하지만 테러라는 이름으로 나와 다른 종교를 믿는 이들을 함부로 단죄해서는 안 된다. 다문화 가정이 더욱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함께 사는 것의 중요성을 인식해야 한다. 함께 산다는 것은 서로 존중한다는 것이요 동시에 서로의 문화를 나눈다는 것이다. 사실 이슬람의 종교와 문화가 한반도에 유입된 것은 13∼14세기 고려시대였다. 고려사에 ‘회회인(回回人)’으로 기술된 투르크계 위구르인들이 수도 개경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형성했으며 고유 의상과 언어, 문화를 그대로 유지하였다. 세종대왕 때엔 궁중 행사에 무슬림 대표들이 코란을 낭송하며 임금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조선의 유교사상으로 인해 이슬람은 15세기 중엽 이후 우리의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우리는 이미 타민족 혹은 타종교와 살아가는 법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여인들의 옷차림이나 기도 방식 등 이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에게 생소하다 할지라도 그것을 맹목적으로 비판하지 않는 자질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들 안에 있는 근본적인 인간적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요, 그들이 지닌 고유한 종교적 가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사이의 공통점과 상이함을 본다는 것은 곧 대화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부각시키는 것이라 생각한다. ‘교황청 종교간대화평의회’가 5월 18∼19일 개최한 간담회에서 지적하듯, 종교 교육은 타종교에 대해 열려 있는 정체성을 심어주는데 초점을 두어야 한다. 한 종교와 다른 종교의 관계가 상호 적대감이나 투쟁으로 인식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교황 베네딕도 16세 역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의 연결 고리임을 강조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지금 내 옆을 지나가고 있는 무슬림은 나의 형제요 자매이지, 폭력과 파괴를 꾀하고 있는 테러리스트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을 폭력주의자로 만드는 것은 정말 그가 폭력을 행사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갖고 있는 편견이나 선입관 혹은 나의 폭력성을 투사한 결과가 아닐까.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