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 속의 천주교에 대한 관심은 중학교 2학년 중간고사 세계사 시험문제 중 삼위일체는 무엇을 가리키는가란 문제의 답을 적어 내지 못했을 때의 어렴풋한 기억이 있다. 삼위일체는 학원에서 교재로 쓰는 영어 참고서로 밖에 생각이 안났다.
그 뒤 고등학교 진학시험을 볼 때 일주일 내내 열심히 성당에 다니며 빌었다. 고등학교에 붙게 해주시면 교회에도 열심히 다니고 부모님 말씀도 잘 듣고 공부도 열심히 하겠다고…
고등학교로 진학한 뒤 나는 하나도 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대학 입시를 앞두고 나는 초조해져서 깜깜한 밤에 두꺼운 책가방을 든 채 잠겨진 성당 부근을 배회하기도 했다. 난 다급하고 초조했다. 지원했던 학과의 비율이 너무 높아 자신 없는 마음으로 수험표를 두 손으로 모은 채 명동성당의 사람 없는 뒷좌석에서 착잡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렸다.
그때는 미사의 내용도 못 알아들었으며 지루하고 길게 느껴져 미사가 끝나는 시간을 맞추어 학원 앞 냉면 집에서 냉면을 먹으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염치없는 기도에도 자신이 없고 머릿속은 온통 산만하고 잡념으로 정신 집중이 안 되어서인지 전후기 대학에서 고배를 마셔야 했다. 이 세상의 고민은 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처럼 성모상 앞에 꿇어 앉아 한껏 센치해졌다. 대학생은 되고 싶지만 재수를 해서 일 년간 지긋지긋한 책을 다시 들춘다는 것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집에서 놀다가 취직을 하였다.
직장 생활을 오래하며 기쁠 때 보다 괴로움이 있을 때면 무관심했던 성당에 가끔 찾아 갔다. 천주교 주위를 배회하면서도 선뜻 신자가 되지 못한 건 어떤 종교에 소속되어 그 외의 종교에 깊은 관심을 보이면 안 된다는 나 나름의 판단과 교인이 된다는 부담감이 무척 망설이게 했다.
복잡한 미사 진행이 가끔 찾아가는 내게는 무척 낯설고 어느 교처럼 금방 그 물결에 휩쓸리는 게 아니라 교리를 배우고 영세를 받아야 하는 까다로움이 믿음의 자세를 확인하는 천주교의 매력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친구나 주위에서 변화를 보일적마다 허전했고 나보다 나은게 없다고 생각된 애들이 자기의 삶을 찾아 행복해 하는데 자존심이 상했다.
이런 질투는 내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는 오만에서 나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원망스러웠고 허탈과 고독이, 대답없는 하느님에 대한 안타까움이 쌓여 어디엔가 의지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했나 보다.
영세 받기 전까지의 망설임은 영세를 받고 미사 참례를 하며 진행 과정을 몰라 지루하게 느꼈던 옛날이 아닌, 깊이와 약간의 성스러움을 느끼며 참신하게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전에는 종교를 가질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고 산만해서 선뜻 교를 택하지 못했었다. 지금도 주위에서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다들 돌아보는 것 같다. 지금 나의 믿음은 여리고 불안하지만 높은 곳을 향하여 조금씩 나아가야겠다. 지금까지는 맹목적으로 무엇을 이루어 달라는 부탁 기도만 되풀이했었다. 부끄러웠다. 소원을 빌기 전에 결정을 극복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려야 하는데…
진작 종교를 가졌으면 많은 도움이 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오랜 방황 끝에 지치고 병들어 집을 찾아온 초라한 방랑자 같았다.
서중주의 국화 옆에서처럼『머언먼 옛날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선 내 누님 같은 꽃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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