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회 이백주년 기념사업 위원회(위원장 김남수 주교)에서 추진하고 있는 시복 시성 추진 사업과 역사 자료 편찬 사업의 추진 과정에서 우리를 놀라게 하는 소식들이 종종 없지 않았으나, 이번처럼 김대건 신부 이전에 이미「마카오」와 중국에 한국인 대신학생이 있었다는 새 소식은 비록 그 인물들의 인적 사항이 구체적으로 밝혀지지는 아니한 상태라 하더라도, 우리의 신앙사에 대하여 우리가 현재 지니고 있는 식견이 너무나 불충분함을 느끼게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기회에 우리가 되새겨 볼일은 바오로 정하상을 위시하여 국내에도 재 신학생들이 있었고, 기해박해에 순교 학생들이 있었고, 기해박해에 순교하였지만, 이들은 김대건 신부보다 훨씬 앞서는 최초의 대신 학생들이었다는 점이다.
즉 1939년 44세의 대신 학생으로서 신품을 못 받고 안타깝게도 신학생의 신분으로 순교한 정하상의 학식 덕행과 업적을 불 때, 어떤 이유로 신품을 못 받았어야 했는지는 앞으로 멀지 않아 밝혀져야 할 사실 중의 하나로 우리는 믿고 있지만, 적어도 오늘날 너무나 많은 교우들이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이제 1836년에 김대건 소년이「마카오」로 유학의 길을 떠난 그 이전에「마카오」와 중국「리아동」지역에 한국인 대신 학생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여가 지면에서 의미가 있겠지만 특히 유럽의 외국인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이전에 이루어졌다고 볼 때 이 역시 한국 천주교회만이 지니는 또 하나의 특이한 신앙사의 일면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그 대신 학생들의 이름을 비롯한 구체적인 인적 사항이 밝혀지고 거취가 확인 괴기를 기다리며 바라겠지만 그 이전에라도 또 역사 자료의 손실로 인하여 불행히도 신학생 등이 있었다는 사실, 그 이상으로는 전혀 밝혀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 사실의 의미와 가치 발견에 있어서 감격치 않을수 없다고 하겠다.
즉 자발적으로 진리를 탐구하고, 자발적으로 성세를 받고 오도록 삼천리「북경」땅을 善意에 불탄 나머지 임시 준 성직 제도를 자발적으로 수립하여 신자들을 돋보며 교회를 발전시키다가「북경」주교에게 문의하여, 중지하라는 명을 받고 즉시 그치고 순명하는 동시에, 정식 성직자 보내 주기를 요청하기 시작하는 것이 1789년부터였다.
아무나 미사를 집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서, 사제를 모셔 오기 위하여 온갖 고생을 다한 우리 선조들이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 무관심 했을 리가 없고, 특히 불교의 스님들 제도를 익히 알고 있던 터이므로, 조선 교구 설정 이전에 즉 1789년부터 김대건 소년이「마카오」에 가던1836년경까지 47년간 즉 반세기 동안 한국인 사제 양성에 착안치 못하였다거나, 성소가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을까 한다. 따라서 브뤼기에르 소 주교의 편지 중에 한국인 신학생들이 희망적이며, 「리아동」지역에 조선인 사제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설립해야 하겠다는 말속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 것으로서, 이미 그 때부터 한국 천주교회에는 사제성소가 적잖이 있었기에 한국인 사제 샹성 신학교 설립이 거론되었으리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알려지지 않은 저 재 신학생들의 개인 인물이 밝혀지는 데에 보다도 한국 천주교의 초기 교회 역사가 지니고 있는 값진 보배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더욱 그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며, 캐내어야 한다고 보는 바이다. 모름지기 역사 학도들은 보다 활발한 연구로써, 한국 천주교회의 빛나는 역사의 새 국면을 드러내는 일에 분발하여 주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사실상 우리 선조들의 발자취는 지금 기록으로 전해 오는 그 이상의 면모가 더 많을 것이니, 예컨대 중공과의 국교가 정상화되어 중국에 있을 수도 있는 자료들을 접하게 될 때, 우리는 적지 않은 새 사실들을 알게 되리라고 믿는 바이다. 한국 천주교회 2백주년을 기념하는 시기에 우리 교회의 역사를 바르게 정립하여 놓는다는 사실은 실로 한국 교회의 어제와 내일을 위하여, 오늘의 우리 모두에게 부여된 시대적 사명 중의 하나가 아닐 수 없다고 하겠다.
물론 자료 발굴 과정에 많은 어려움이 있을 수 있고 또 있을 수 밖에 없지만, 그러나 이러한 난관을 헤쳐 나가는 것이 바로 2백주년을 기념하는데 있어 우리가 지불해야 할 불가피한 희생이 아닐까 한다. 전국 교회는 이러한 소식에 놀람과 감격에 머물 것이 아니라 차분한 반성과 맑은 판단으로, 그리고 굳은 의지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 나가야 할지, 역사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고 있는지,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일 중에는 선조 등의 후예답지 못한 면은 없는지, 냉엄히 그리고 겸손히 묵상해야 할 것이며 이러한 힘을 쏟고 있는 기념 사업 위원회에 협력과 성원을 아끼지 말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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