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살이가, 대학 4년을 합치고 부산에서 보낸 3년을 빼고 하다보면 꼭 20년째다. 20년이 넘게 서울에 살면서도 매양 경상도 사투리 이외에는 입에서 나오는 것이 없고 남처럼 수없이 이사를 했으면서도 江北하고도 구파발, 구파발하고도 경기도와 접경이 되는 곳에 살고 있다.
말이 단독주택이지 내 집은 대지의 받은 허가가 나있으나 반은 무허가로 등기조차 할 수 없는 그런 집이다. 남들이 알면 오죽 고지식했으면 하겠다.
굳이 남의 말 할 것조차 없지만 내 친구들은 몇 차례 이사를 하고 강남의 수십평 아파트에 떵떵거리고 살고 있고 심지어 서울살이엔 나보다 훨씬 후배인 녀석들조차 비슷한 처지까지 가있는데 유독 나만 이 지경이다. 아닌 말로 남의 보증이라도 서주었다가 신세망친 일도 없고 봉급봉투 날려가며 남한테 걸판지게 술 한 잔 산일도 없고 집안에 우환이 겹쳐 그것 막느라 물 쓰듯 돈쓴 일도 없다.
그렇다고 어디 금싸라기 땅이라도 사놨느냐하면 천만의 말씀이다.
매양 원고 써서 용돈 벌고 회사에선 남보다 꿀릴 것 없는 봉급 받아 착실하게 생활해왔을 뿐인데 왜 남들이 토끼걸음으로 달리고 있을 때 나는 오히려 조금씩 조금씩 뒷걸음질인가? 그래서 구파발하고도 경기도와 접경지에 등기 못내는 집에까지 밀려가 기껏 한다는 소리가『공기 좋고, 교통 좋고…』따위의 씨도 안 먹은 강변이나 늘어놓아야하는가?
제일의 이유는 여편네나 나나 도무지「콩난데 콩심는 식」이란데 있다. 그냥 번 돈으로 자족하고 그것으로 빚진 것 갚아가며(맨손으로 시작했으니) 먹고살고 그것으로 우리 천주님께 늘 감사하는 식의 습성.
그래서 강남의 아파트 투기가 거셀 때도 뛰어들 생각은 염두에도 없었고 언제나「강 건너 등불」로만 보였었다.
어쩌다 술이라도 마시고 들어와 『당신도 그 뭐 복부인 노릇이나 좀 해보지 그랬나?』하고 벼락부자가 된 친구의 예를 들어 은근히 타박도 주지만 대답은 나에 대한 타박으로 되돌아오기가 일쑤였다.『이 쪼끄만 집하나 지닌 것도 천주님께 감사하자구요』가 항상 결론이었고 둘째 이유로는 「江南에 가기 싫다」는 것이다. 은평구쪽으로만 뱅글뱅글 돌았는데, 그러니 은행에 집 잡히고 융자 얻어 조금 키우다가, 그런 은행돈 갚기가 귀찮아 단촐한 연립주택에 들어간 것이 결국엔「失機」가 된 꼴이었다. 연립주택값이 단독주택값에 비해 오히려 뒷걸음질이란 사실을 확인한 것은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집을 내놓고 금방이었다. 지금 구파발에 있는 집은 당시 연립주택 살 때 돈으론 두 채나 살 수 있었다는 것을 알고 나는 차라리 웃고 말았다.
서울살이. 거기에다 집같은 집으로 들어가 제법 사람답게 살려면 남보다 앞장은 고사하고 따라가는 시늉이라도 해야겠구나하는 생각도 해본다. 시내버스를 타야겠다고 와글와글 서 있다가 버스가 오면 우루루 몰려가는데 어느 누가 혼자『저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모두 타랴. 에라, 다음 차나 타자』하고 빈 버스를 기다리고 기다리는 사람은 결국엔 집에 도착하는 시간만 늦출 뿐 별무효과인 것이다.「막차탄다」지만 막차도 못타는 것이 나의「주제파악」일 것이다.
그렇지만 앞산에 자욱한 초록과 신선한 새소리에 취해 아침시간을 보내노라면 마음 하나는 더없이 편안하다. 더욱이 뜨락에 뒤늦게 핀 한 두 송이 빨간장미의 이슬을 털고 기지개를 켤 때의 느긋함이라니. 江南의 아파트村에선 기대조차 할 수 없을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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