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9일은 민족문화의 상징인 한글의 제정과 반포를 기념하는 날이다. 이 한글날을 보내면서 우리는 복음과 문화의 관계, 그리고 한국교회와 한글의 관계를 확인해 보며, 우리 교회의 자세를 점검해 보고자 한다.
그리스도께서 선포한 복음은 문화가 아니며, 모든 종류의 문화를 초월해서 존재한다. 복음은 특정문화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 진리를 말한다. 그러므로 모든 문화에서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이를 자신의 빛과 생명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복음은 문화의 통로를 통하여 각 민족에게 효과적으로 전파될 수 있으며, 이 때문에 복음을 수용하는데에 있어서는 문화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복음의 말씀을 민족에게 체득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복음과 민족문화의 표현수단인 언어와 문자에 대한 관심을 소홀히 할 수가 없다.
지난날 우리 교회는 한글 및 한국어의 보급과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기여를 하여 왔다. 복음이 이 땅에 전파된 직후부터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복음 성서를 비롯한 많은 교회서적을 우리말로 번역하였다. 그리하여 박해시대의 어려운 환경에서도 그들이 번역한 한글 교리서는 이미 2백여 종에 이르게 되었다. 당시의 교회는 천대받던 한글의 기치를 발견하고 이를 교회의 공용문자로 인정했다. 그리고 교회는 신도들에게 한글을 보급하기 위하여 상당한 노력을 전개하였다. 한글보급을 위한 교회의 노력은 부드러운 모국어로 복음을 심어 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민중에 기반을 둔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 나가려던 시도이기도 하였다. 교회는 박해가 끝난 이후에도 한글의 보급과 연구에 계속하여 기여하고 있었다.
사전과 문법서가 교회의 손에 의해 편찬되었던 것이다. 또한 일제시대 한글학회가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할 때, 이에 참여하고 이를 적극 수용하는 진취적 자세를 드러내 주었다. 이러한 우리 교회의 전통을 되돌아보며, 우리는 오늘날 한글문화와 복음화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확인해보려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문제들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즉, 첫 번째로 우리는 교회의 공용어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게 된다. 1960년대 후반기 우리 교회는 공용어 심의위원회를 구성하여 교회용어를 가다듬는 작업을 전개한바있다. 이는 당시의 교회가 한국문화를 바탕으로 하여 현대사회에 적응해보려던 노력의 표현이었다. 이 과정에서 좋은 용어들이 많이 채택되었고 신도들은 이로써 복음의 가르침에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그런데 교회 공용어의 심의는 신학의 발전 및 사회의 변동에 따라 정기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작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기존의 교회용어를 다시 가다듬고 확정하기 위한 새로운 노력의 필요성을 확인하게 된다. 우리는 교회 용어들이 통일되지 않아 빚어지는 혼란과, 부적절한 용어의 사용으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오해의 소지를 막아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신학자, 국어국문학자, 교회사학자들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공용어심의위원회의 새로운 활동을 기대하게 된다.
두 번째로는 기존의 기도문에 대한 재검토 작업이 필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기도문은 신도들의 신심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기도문은 신학적으로 흠이 없어야 하며, 동시에 문학적 가치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국어 문법에 맞아야 한다.
또한 기도문이 한국의 문화전통과 호흡을 같이할 때 신도들의 신심에 더 큰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 그런데, 현행기도문 중 일부에는 한국의 문화적 체질과는 동떨어진 내용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토씨(助詞)를 함부로 생략하거나 사역형ㆍ피동형문체를 납용 하여 서툰 번역문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기도문도 있다. 이러한 기도문들을 바로잡는 일은 신도들의 올바른 신심생활과 언어생활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글날을 보내면서 신도들의 신심을 다듬고 민족의 언어문화를 가꾸는 문제들을 생각하며 기도문에 대한 재검토 작업을 제안하는 바이다.
복음의 가르침은 한글과 한국어의 표현수단을 통하여 우리민족에게 육화되어 나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교회는 이 땅의 복음화를 위해서도 한글문화에 대한 꾸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교회는 한글의 보급과 연구에 기여한 과거의 공적을 자랑하기에 앞서 이를 계속 연구하고 가다듬어 나가야 한다. 그래야만이 과거의 전통도 빛날 수 있으며 지난날의 전통이 오늘의 신도들에게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교회에서는 신도들을 대상으로 하는 모든 간행물에 한글 가로쓰기를 적용하는 문제에 관해서도 검토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 교회 앞에는 한글문화를 기본으로 한 한국천주교 문화의 확립이라는 과제가 놓여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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