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간의 어학공부기간을 마치고 사목생활의 첫 발을 내디디신 곳이 타지방 사람들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이곳 예천이었습니다. 신부님은 다른 풍습 때문에, 언어의 어려움 때문에, 사고방식의 차이 때문에 수많은 고통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교통수단이 빈약했던 당시 4~5십리씩 되는 공소를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걸어 다니셨던 신부님, 『어찌 그리도 빨리 걸어가십니까?』같이 가던 사람들이 겨우 따라와 이렇게 물어보면『내 발에는 발통이 달려있지요!』라고 대답하셨다지요.
걸음에는 단연코 금메달감이셨던 신부님, 복음전파에 대한 신부님의 열성 또한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습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 발 빠른 걸음은 우리에게는 너무도 소중한 유산입니다. 걸음마다 심어놓으신 복음의 씨앗이 고마와, 씨앗 하나하나를 기억해두시는 신부님의 정성에 감격한 이곳 신자들은 신부님의 발을 생각하고 은경축 선물로 한국의 신발인 짚신을 한 켤레 마련했습니다.
신부님께 이 짚신의 뜻을 이렇게 설명 드리자 두 손을 잡으며 무척이나 고마와하셨지요.
갓 한국말을 배우셨을 땐 어디 속 시원하게 말씀이라도 하실 수 있었나요? 그러니 말보다는 행동(?)이 앞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신부님께 뺨을 맞은 사람, 영문도 모르고 꾸지람을 들은 사람, 황급히 도망쳐 위기를 면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아직도 신부님 이야기를 하고 있답니다. 신부님이 왜 그리도 화를 내셨는지-지금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신부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 고향과 부모친척 모두를 아낌없이 버리고, 이 험한 곳에 오시어 오로지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고자 하셨는데, 우리들은 신부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않은 채 자꾸만 하느님을 멀리하고, 이기주의적인 신앙생활만 하고 있었으니, 그 어찌 화가 나지 않으셨겠습니까?
신부님의 은경축하식-모두들 기뻐하며 축하드리고 선물도 드리고 마음도 드리고 나서, 신부님의 말씀을 들을 때가 되었지요. 그때 신부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내가 호랑이같이 무섭게 하고 화를 내어 신자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린 것을 진심으로 용서청합니다. 예천ㆍ청송ㆍ다인 그리고 봉화에서 내가한 모든 잘못을 용서해주세요!』지금 생각해보면 신부님께서는 그 때 이미 당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계셨는지요? 은경축 다음날은 주일이었는데, 그날도 신부님께서는 용서에 대해 강론했다지요? 용서해 줘야한다고, 겉으로가 아니라 마음속 깊이에서 진정으로 용서해 주어야한다고. 신부님은 참된 용서에서 참된 기쁨과 평화가 온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용서하고 용서받을 수 있기에 오늘 신부님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평화스럽게 주님대전에 나온 것 아니겠습니까! 용서받고 용서해줄 수 있었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도 기뻐할 수 있었고, 아니 그 이상 계속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신부님께서는 당신의 마지막 삶을 용서로써 마치셨고, 기쁘게 죽음을 준비하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직하게 생기셨고 좀 모지란 듯이 보이셨던 신부님은 보기와는 달리, 이곳 예천을 떠나신 지 20년이 지났는데도, 이곳에서 안 신자들의 이름을 오늘날까지 기억하고 계실정도로 뛰어난 기억력을 지니셨습니다. 이는 바로 자신의 양을 알고 그 양들을 하나하나 불러주는 예수님을 본받은 목자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신부님의 죽음을 슬퍼하는 많은 이들도, 하늘나라에 계신 신부님이 이제는 주님 곁에 그 전처럼 우리를 하나 하나 기억하고 계시리라는데 위안을 얻습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