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너의 잘한 일을 적는다면 몇 편 되겠지만, 너의 숨겨진 허물을 기록하면 책은 끝이 없으리. 너는 사서(四書)와 육경(六經)을 안다고 말하지만 그 행실을 살핀다면 부끄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조 임금이 승하한 이듬해인 1801년부터 18년이라는 오랜 유배생활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온 다산 정약용은 1822년 자신의 회갑을 맞아 그간의 삶과 학문적 업적을 정리한 묘지명을 짓는데 이 글은 이른바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 나오는 내용이다. 죽음을 염두에 두고 쓴 글이니 만큼 삶에 대한 그의 자세나 진지함이 묻어난다.
알려진 대로 정약용은 권력과 학문의 중심부에서 떨어져나와 유배로 점철된 고통스런 상황을 오히려 학문에 몰두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로 삼아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감히 상상하기도 힘든 광대한 학문적 업적을 성취한 위인으로 역사에 남아 있다. 특히 유교 경전인 사서 육경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경세유표(經世遺表)」「목민심서(牧民心書)」「흠흠신서(欽欽新書)」등 일표이서(一表二書)로 대변되는 정치사회적 개혁안은 지금도 영화로 만들어져 인구에 회자될 정도로 숱한 이야깃거리를 남기고 있다. 이러한 다산이었지만 학문이 아닌 ‘실존’의 자리에서는 부끄러운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아마 그것은 남이 모르는 자신의 내면에 숨겨진 허물, 몸소 갈고닦아온 경전의 가르침에 부합하지 못하는 실천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지난 60년 삶을 모두 ‘죄를 지어 후회스런 세월(罪悔之年)’이라고까지 고백한다. 다산의 위대성을 논한다면 바로 그의 이러한 고고한 정신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동시대를 살다간 이들이 다산에 대해 많이 들려주지 않아 그의 면모를 직접적으로 알기는 힘들지만 모르긴 몰라도 참된 성찰과 통회의 삶에 가까이 다가선 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품기는 어렵지 않다.
늘 스스로를 돌아보고 자책하길 주저하지 않았던 정약용은 사람이 잘못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 실존적 변화의 힘을 ‘정직한 후회’에서 찾았다. 그래서 그의 관점에서 보자면 성인(聖人)은 허물이 전혀 없는 신적인 인격이 아니라 후회를 ‘잘’해서 허물을 반복하지 않는 ‘반성적인 인격’으로 볼 수 있다. 필자는 이러한 다산의 눈길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던 베드로의 모습을 떠올렸다. 어쩌면 베드로 사도로 봐서는 치욕이라고까지 할 만한 일을 역사상 가장 많은 이들이 접한 성경에까지 담아 전한 뜻은 무엇일까.
몇 몇 단편적인 글로 정약용의 삶과 학문을 접해온 필자로서는 그의 깊이를 논할 처지는 못 되지만 그의 이런 삶의 자세만큼은 그의 학문적 성취를 뛰어넘는 또 하나의 실천적 결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시로 잘못을 범하게 되고, 따라서 삶에는 늘 후회가 따라다니기 마련이다. 하지만 다산의 말대로 후회가 자신과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의 발전을 위한 밑거름이 되지 못한다면, 그래서 베드로가 보인 통회의 눈물로까지 이어지지 못한다면 거짓된 모래 위에 성을 쌓는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런 일들을 교회 안팎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는데 있다. 자신의 눈앞에 닥친 위기 상황만을 모면하기 위한 방편으로, 또한 자기변명으로 일관한 후회가 난무하고 있다. 더구나 우리 주위를 보면 지위가 높고 명망이 높을수록 자기 잘못을 정직하게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경우가 적지 않은 듯하다.
누구나 윤동주 시인처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노래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직한 후회와 그에 따르는 통회가 없고서는 베드로 사도의 새로남도 없음을 성경은 들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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