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 S는 그가 봉직하고 있는 S대를, 그만하면 지상낙원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라고까지 생각하고 있다. 학생들은 총명하고 선량하고, 동료 교수들도 모두 은근(慇懃)한 군자들이다.
S는 대체로 교수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다. 언제나 느지막한 시간에 가기 때문에 여기저기 자리가 비어 있다. 아무데나 골라잡아 앉는다.
그런데 통계학관가 경영학과던가를 전공한 교수 K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걸어 들어온다. (이 시간에 저자가 웬 일이지? 일행을 놓쳤나?)
K는 배짱이 맞는 교수들과 어울려서 맛 좋기로 소문난 집을 잘 선별하여 원행(遠行)을 마다하지 않는 그룹 중의 하나다. 이른바 식도락가라는 칭호를 듣는 패의 일원이다.
S는 반사적으로 자세를 가다듬는다. K는 아무렇지도 않게 S의 맞은편에 앉는다.
이제 판박이 독백이 나올 차례다. 영락없다. 크게 한숨 한 번 내쉬고는, “오늘은 뭘 먹나!” 대사 읊듯 내뱉는다. 이것저것 골라 담은 쟁반을 들고 와서 (셀프 서비스다) 한두 가지 맛보고는 “이걸 음식이라고 내놓나!” 이것 역시 정해놓고 듣는 대사다.
S의 심기가 편치 않다. K는 S보다 10년 정도 젊다. S의 기분을 굳이 표현하자면, 미거(未擧)한 아우의 언동에 화가 나는 형의 기분, 그런 것이다.
겉으로는 말이 없지만 S의 마음 안에선 K의 불평에 대한 맞장구가 터진다. (그렇게 맛이 없으면 한두 끼 굶으시오! 약이 될 것이외다!) 이윽고 음식을 먹다 만 K와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나눈다. K는 자자고로한 상식이 많아서 듣기 심심치가 않다.
K의 얘기를 들으면서 S의 머릿속에선 일종의 ‘식도락 론’ 같은 것이 조촐하게 정리된다. 골자는 다음과 같다.
K는 틀림없는 식도락가다. 이것저것 색다른 요리에 대해 아는 것이 많고 미각도 아마 세련된 편일 것이다. 그러나 K의 식도락은 다소 병적(病的)이다. 더 맛있는 것, 더 색다른 것만을 찾아 먹는 사이 미각에 나쁜 버릇이 붙어 이젠 보통 음식 가지고는 짜증만 나는 신세가 돼버렸다.
인생에서 쾌락적인 요소를 배제할 수는 없다. 본능도 그렇다. 그러니 쾌락은 사람이 삶을 이어나가는 데에서 없어서는 안 될 구실을 한다. 그러나 약삭빠르게 쾌락 자체만을 좇다보면 그런 추구가 어느 틈엔가 병적인 취미로 타락하게 된다. 이것이 쾌락이 갖는 함정이다.
병적으로가 아니라, 건전하게 쾌락을 주물러서 내 것으로 만드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쾌락(재미) 추구에서 그것에 대한 값과 세금은 꼭 선불(先拂)해야 된다는 기본 원칙이다. 고생 끝에 낙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육신을 노동으로 알맞게 피곤하게, 배가 고픈 상태가 되게 해야 한다는 방법이다. 이렇게 되면 모든 음식이 거의 예외 없이 꿀맛이요 진수성찬이다. 이거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식도락이 아닌가.
S는 저녁상 앞에서 배어나오는 눈물을 감추려고 하지만 결국 들키고 말았다.
“아니, 당신 우시는 거예요?” S는 우물쭈물 얼버무리려고 한다. “이게 두릅이요 더덕이요?” “두릅이에요.”
온종일 바스락바스락 작업을 하느라 배가 무척 고픈데다가 아내의 요리 솜씨가 일품이다. 청양고추가 알맞게 맵다. 게다가 막내 며느리가 이바지로 가지고 온 안동소주 맛이 또 천상적(天上的)이어서 황홀하다 못해 감격의 눈물이 흐르는 것이다. 나야말로 진짜 식도락가 아닌가! 중얼거리는데, 그 이제 먼 과거에 영영 묻혀버리려고 하는 정년퇴임 전 교수식당의 광경이 “오늘은 뭘 먹나” 하는 대사와 함께 머리에 떠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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