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는 7색이다. 내가 여전히 기억하고 있을까? 빨주노초파남보, 더듬 더듬이지만 기억은 하고 있구나.
이 중에서 빨강은 광파의 파장이 제일 길다. 더 길어지면 빛깔로 나타나지 않고 열작용(熱作用)으로 나타난다. 곧 적외선(赤外線)이다. 파장이 가장 짧은 것이 보라색이며, 더 짧아지면 육안으로는 안 보이는 자외선(紫外線)이 되며 이 광파를 이용한 것이 자외선 사진이라고 나는 알고 있다.
무지개는 고은 빛깔들이 제각기 제 영역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그 경계선은 확연치 않고 모호하다. 어디까지가 초록이고 어디까지가 하늘색(靑)인가? 분명히 선을 그어 말할 수가 없다. 모호한 경계선을 지나면 차츰 뚜렷한 고유의 빛깔 한복판에 들어가게 된다.
이 점에 착안해서 비유 하나를 떠올리게 된 것이다. 빛깔들이 서로 경계선을 다투지 않으면서 스스로의 영역은 선명하게 지키고 있는 아름다운 무지개의 존재 양식, 이런 양식이 현실과 이상(理想)의 관계를 나타내는 비유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살아나가는 삶의 터로서의 현실, 그리고 삶의 일환(一環)으로서의 이상, 이 두 영역이 기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만큼 명확하지가 않은 것이다.
우리가 급히 필요한 돈을 마련해야 하고, 마감 날까지 원고를 완성해야 하고, 애를 늦지 않게 입학시험장에 실어날라야 하는 일, 이런 일들은 모두 현실의 한복판에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당장 급한 일들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우리의 생각은 조금 앞서서 달려가고 있다. 그 생각은 가까운 미래에서, 동시에 또 먼 미래에서 우리를 부르고 있는 이상(理想)의 별, 희망의 별을 바라보며 현실에서 방향을 잡는다.
엄밀한 의미의 순수 현실, 또는 엄밀한 의미의 순수 이상, 이런 것이야말로 얼마나 비현실적인 추상에 불과한가 하는 것을 깨닫는 것은 하나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현실’이라는 말보다 더 움직일 수 없는 분명한 경계선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사람들이 이 사실을 궁금해 하는 심리는 여간 강한 것이 아니다.
축사나 기념사 같은 간단한 연설을 할 때, 그 안에 숫자, 수량, 있는 그대로의 상황 등을 담으면 청중은 겉으로는 관심 없다는 표정을 하면서도 마음 안으로는 열심히 귀를 기울인다. 가령 나의 한 달 수입이 얼마라고 구체적으로 숫자를 넣어서 말하면 모두들 흥미 있어 한다. 마음속으로 비교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저 자 나만 못하군!’ 이런 우월감에 젖거나 ‘뭐! 수입이 나의 3배야! 이거 정신 차려야겠는 걸!’ 이런 식이다.
반면에 좋고 좋은 말들만 모아서, 나무랄 데 없는 모범답을 들려주면 (사실과는 거리가 있는) 겉으로는 진지하게 듣는 것 같아도 실은 별 흥미가 없어 금방 잊어버리고 만다. 반발하는 심리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흥! 나를 가르치러 드네.’
움직일 수 없는 진실은 하나밖에 없는 것 같은 ‘사실’도 정밀하게 들여다보면 보는 이의 주관에 따라 그 경계선이 미묘하게 흔들림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천년 의 먼 시간이 흐른 사건의 ‘사실’은 과연 어떠한가? 진실에 상상이 덮쳐져 완전 신기루다.
서로 대립항(對立項)을 이루는 사실, 현실, 실상(實像), 현황, 실화(實話) 이런 말들과, 바람(希求), 이상(理想), 꿈, 신화(神話), 허구, 이런 것들의 한계에 대해서 프랑스의 장 콕토는 참으로 의미심장하고 재미나는 말을 했다. 그는 말한다. ‘갈수록 진실로 들어나는 것이 신화(神話)요, 갈수록 거짓으로 드러나는 것이 역사다.’
무지개는 신비롭고 아름답다. 저 아름다운 무지개가 현실과 이상을 말하는 비유가 될 수 있을까? 이런 비유가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은 오히려 너무나 당연하다. 힘들고, 무정하고, 슬프고, 오염과 공해로 죽음에 닿아있는 현실이지만, 그 너머에서 반짝이는 장밋빛 생명을 붙들려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현실은 갸륵하게 아름답다. 이상이 이끄는 현실. 현실에 뿌리박은 이상. 그러기에 시인 워즈워스(Wordsworth)는 무지개를 좇는 어린이를 ‘어른의 아버지’라 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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