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가 어른을 모시고 결혼승낙을 받아야 할 자리에서 세례를 받지 않으면 허락할 수 없다는 지금의 장모님께 나는 죽어 다시 태어나면 천주교를 믿겠다고 말할 정도로 고집불통이었다. 아이들은 제 어미 희망대로 하겠다고 약속드린 후 관면혼배로써 가정을 이루었지만 그로부터도 8년을 외인으로 살았으니 아내의 걱정과 불편은 어떠하였을까?
성당만 다니면 어떠한 고생도 참고 살겠다는 간절한 소망을 귓가로 흘러버리던 이 무심한 사랑도 마침내 백기를 들 날이 오고 말았다. 성당에 나가게끔 해준 많은 분들의 기도와 고마움은 지면상 생략하기로 하고 지금은 구봉에 계시는 김윤근 신부님의 특별교리를 받던 예비자 때도 아내를 따라 미사 예절을 조금씩 엿보기는 하였는데 그날 나 혼자 간 것이 실수의 원인이었다.
남들 하는 대로 따라하면 되는 것인 줄 알고 영성체하는 신자들 틈에 당당히 섰다. 앞 사람들이 하는 것을 유심히 봐두었다가 나도 똑같이 두 손을 포개어 공손히 내밀었다. 그런데 빵은 주시지 않고 내 얼굴만 쳐다보시더니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 순간 어찌나 미안하고 섭섭하지 바삐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퉁명스럽게 쏘아 붙였다.
『음식 끝에 마음 상한다고, 빵 조각 하나 가지고 그렇게 무안을 주나! 그래 아무나 주면 안되는기가?』생각하면 할수록 무안스러워 반나절을 투덜거렸다.
기왕에 젖어 살던 타 종교와의 갈등으로 교리를 듣는 둥 마는 둥 6개월을 보내고 아내의 간청과 신부님의 사랑으로 세례를 간신히 받긴 받았는데 이 짧은 교리지식을 아이도 눈치를 챘는지 어느 날 아침 작은 아이가 느닷없이『아빠, 소죄가 뭔데?』하고 묻질 않는가. 내가 그걸 어찌 아노. 그렇다고 말없이 있자니 체면 문제이고. 이럴 때 거꾸로 아이들 버릇이나 고치자 싶어 대답하길, 『숙제 잘 안하고, 학교에 늑장부리고, 엄마 말 잘 안 듣고 하는 게 소죄지』『그럼 대죄는 뭔데?』『거기사, 어린이미사 안갈라카고, 학교 안갈라카는 것, 전부 대죄지』아이들 이라고 얼토당토 않는 말로 감정과 약점을 건드린 게 탈이지, 이 말이 떨어지게 무섭게『그럼 중죄는 뭔데?』이런 맹랑한 것 좀 보소. 소죄 대죄도 모르는 나에게 중죄를 묻다니, 중죄가 과연 있기는 있는 것인가?
순간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딸 있는가 보다. 『중죄는 뭔고하니, 소죄 프라스 대죄 나누기 2하면 되는 기라』갓 1학년짜리가 이 대답에는 얼떨떨하여『프라스가 뭔데?』『더하기 말이다』한번 물었다 하면 좀처럼 물러나지 않는 아이의 버릇을 잘 아는 아내가 내 편을 들었다. 학교 빨리 가라고! 아이는 그 재촉에 가방을 등에 지면서도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소죄+대죄)÷2=중죄, 맞긴 맞는 등식 같다.
이래저래 구원군인 아내와 악수를 하면서 한바탕 낄낄거렸다.
망신 직전에 겨우 연합작전으로 아이 하나 엉터리로 물리쳐놓고 둘이서 낄낄 호호거리며 앉아 있는 꼴이 가관이기는 하지만 위기를 벗어난 임기응변이 하도 신통해서 한참은 기찬 웃음을 웃고 있었다.
참 한심한지고! 영혼 하나 구원하기 위하여 8년 그 긴 세월을 기도해 주신 분들의 정성하며, 신부님들의 보살핌 하며, 연세 많으신 원장수녀님의 40주간 성서 가르침하며, 그 위에 성교회가 나에게 투자한 것이 얼마나 많은데 어린아이의 한 물음에도 쩔쩔매고 있었다니! 냉수 남 줄 것 없다. 나나 마시고 정신 차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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