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7월 5일은 김대건 신부가 성인품에 오른 후 처음으로 맞는 축일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해마다 9월 26일을 김대건 신부를 포함한 103위 복자축일로 지내고 또 따로 7월 5일을 순교복자 김대건 신부 축일로 지내온 것처럼 앞으로도 9월 20일을 한국순교성인 103위 전체의 축일로 지내고 따로 김대건 성인의 축일로 지내게 되는 것은 이 축일이 원래 한국성직자의 수호자 축일로 정해진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로 교황청에서는 1949년 11월 15일 김대건 신부를 한국성직자들(외국인도 포함)의 주보로 정하고 7월 5일을 그 축일로 지내도록 허락했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이 사제용 축일표에는 명시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사이에 일반 축일표에서는 단순히「순교자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 대축일」로 표현되고 말았다. 아무리 성직자만을 위한 축일이었다 할지라도 평신도의 참여 없이 이 축일을 효율적으로 지낼 수 없음을 감안할 때 이 축일에 대한 계몽이 미진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사실 충분한 계몽이 뒤따랐더라면 우리 교우들이 김대건 신부가 성인이 된 후 처음 맞는 이 축일을 좀 더 타당한 준비와 함께 여유 있게 맞을 수 있었을 것 같다. 어쨌든 시일은 촉박했지만 처음으로 맞는 우리성인 축일인 만큼 시작을 잘해야 할 줄로 생각한다.
수호성인이란 모든 성인의 통공이란 신조와、내세에서도 성인들이 일정한 사람이나 장소에 대해 계속 특별한 사랑을 갖는다는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어떤 성인을 어떤 지역사람ㆍ직업ㆍ신분ㆍ교회 등의 특별한 보호자로 정하고 특별한 공경을 드림을 의미한다. 성인을 공경하는 데에는 주로 그를 본받고 그의 전구를 청하는 두가지 목적이 있다. 바로 이것이 수호성인일 경우에는 더욱 의무적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김대건 신부를 한국성직자의 수호자로 택한 것은 다른 성인보다 특히 그분을 본받고 그분의 기도를 청하겠다는 결의의 표명이라 하겠다. 우리가 그분을 수호자로 택한 것은 그가 한국인이고 한국에서 살았고 또 한국교회가 무엇을 필요로 하고 있는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지난번 시성식에서 우리 성인들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그분들은 여러분 나라의 참된 아들딸입니다. 혈통으로 언어로 문화로 여러분의 조상이요 신앙에 있어서도 여러분의 부모입니다』또 교황은 우리 주교들에게 이 땅에 빛이 되고자 하는 2백주의 우리의 소망의 실현을 위해서도 우리 순교자들의 전구가 필요함을 상기시켰다.
우리 선조들은 순교자들의 전구능력을 굉장히 높이 평가하였다.
그들은 박해의 결과로 하느님 앞에 힘 있는 전구자의 무리를 보내고 또 그들의 기도의 덕택으로 구원의 열매를 풍부히 맺을 수 있었다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우리는 우리 순교성인들의 전구력을 굳게 믿고 남북통일과 같은 민족의 지상과제가 실현되도록 끊임없이 그들의 도움을 구해야 할 것이다. 뿐더러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들을 귀감으로 삼고 신앙생활에서 그들을 본받는 일이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이 점점 어려워가고 있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문화의 세속화、안락한 생활 등으로 인해 하느님이 점점 인간세계에서 멀어지고 있고 그만큼 하느님의 체험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현대인은 불치병이나 큰 재난의 위협을 받지 않는한 하느님이 없어도 충분히 생활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고 바쁜생활 중에서 하느님을 생각할 시간조차 갖지 못하게 되었다.
대조적으로 우리 순교자들은 하느님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참말로 그들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생활의 중심이요 생사를 좌우하는 최고의 상전이었다. 김대건 신부는 하느님을 임자라고 부르면서 그분에게 죽기까지 충성을 다했다. 우리 순교자들은 하느님을「大君大父」로 섬겼고 박해자들은 그것이 미워서 그들을「無父無君」의 족속으로 몰아 죽였다.
성인은 그 시대의 특별한 필요와 어려움에 대한 하느님의 대답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대의 징조를 깨닫지 못하면 결과적으로 하느님의 대답과 선물이 무엇인지도 깨달을 수 없게 된다. 오늘날 우리에게 103위 성인이 주어진 시대의 징조는 과연 어떤 것일까?
그것을 판명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중 하나가 신앙의 위기인 것만은 틀림없을 것 같다. 분명히 우리도 현대인과 마찬가지로 神의 의미를 상실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성인은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본받고 전구하기 위해 서있다. 성인을 더욱 많이 만들어내는 것보다는 주어진 성인부터 제대로 본받고 우리들의 필요한 도움을 그들에게 청하는 것이 더욱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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