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도 6ㆍ25가 발발한지 34주년이 되는 바로 그날 새벽 이 세상에서 할 일을 다 하고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盧基南 대주교는 「가시는 마당」에서도 이 땅과 한국교회의 앞날에 무엇인가 중대한 경고를 남긴 듯한 느낌을 준다. 그는 분명히 오늘의 한국교회의 자립의 주춧돌을 놓은 한국가톨릭의 슬기로운 지도자요、어진 목자였다. 이런 뜻에서 노 대주교의 생애는 그대로 격동기 한국가톨릭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고인이 걸어온 일생을 돌아보는 것은 곧 20세기 격동기의 한국교회를 말하는 것이 될 것이다.
1902년 초 평남 중화의 한 독실한 천주교 가문에서 태어난 노 대주교는 소년 시절에 황해도 신계로 이사와 프랑스인 본당신부 밑에서 신부가 될 것을 결심하고 17세에 서울 용산신학교에 들어갔고、29세 되던 해、즉 30년 10월 숙원인 사제로 서품되는 동시에 종현 대성당(명동)보좌로 첫 발을 내디뎠다. 이래 보좌신부로서 12년、주교로서 20년 대주교로서 5년、도합 37년간 명동성당을 지켜왔다.
일제 말기에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한국교회의 외국인 교구장까지 日人 신부로 교체시키려한 일제의 종교탄압 정책은 도리어 한국인 교구장을 탄생시키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다. 당시 경성교구장 라리보 주교는 재빨리 이에 대비、선수를 침으로써 노기남 신부를 그의 후계자로 앉히는데 성공하였다. 이리하여 노기남 신부는 최초로 한국인 주교가 되는 영예를 차지하였고 동시에 교구가 설정 된지 1백10여년만에 서울교구가 한국인 성직자에게 이양됨으로써 한국가톨릭 자립화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뿐더러 그는 평양과 춘천의 교구장직까지 겸임하였고、1년 후에는 평양교구장직을 또한 한국인에게 넘김으로써 최소한 서울과 평양교구를 일인의 마수에서 구해냈다. 또한 그는 일제의 강제로 감금되어 있는 프랑스와 아일랜드 출신 성직자들을 보호하는데 전력을 다했고、후일(1962년)그 공로가 인정되어 프랑스 정부로부터「레지옹 도뇌르」란 최고 문화훈장을 받게 되었다.
해방이 되자 노 대주교는 무엇보다도 먼저 교우들에게 기도와 행동으로 대한민국 건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지시하는 한편 자신은 미군정을 막후에서 도우며 건국에 이바지하였다.
또한 46년 김대건 신부 순교1백주년을 맞아 「한국순교자현양회」를 발족시켜 신자들을 신앙으로 무장시키는 한편 당시의 사상적 혼란을 극복하고 국민에게 올바른 방향을 제시할 목적으로 「경향신문」을 창간하였다.
노 대주교는 사회문제에도 일찍부터 큰 관심을 보임으로써 50년 2월 「사회질서 재건」이란 교서를 주교단 공동명의로 발표할 수 있었다.
50년 성년을 맞아 「로마」와 유럽을 방문 중이던 노 대주교는 6ㆍ25발발로 다시 시련기를 맞아야 했다. 그는 즉시 귀국길에 올랐고、도중 도처에서 한국의 어려움과 이에 대한 자유진영의 적극적인 원조를 호소하였다. 그해 9월 귀국하자 그는 밀양과 제주도 등지에서 성직자양성을 가장 긴요한 사업으로 추진시켰고 또한 한때 북한지역이 수복되자 그 지역의 본당신부를 임명함으로써 북한교회의 재건을 꿈꾸기도 하였다. 휴전이 되자 그는 30여명의 신부와 평신도들을 대거 해외에 유학시켜 미리 한국교회에 대비하여 긴 안목에서 인재양성에 눈을 돌렸다. 또 전재민 구호와 교회의 재건을 위해 세계 각국을 순방、인적 물적 지원과 협력을 호소하였다.
그 결과 많은 수도회가 한국에 진출하게 되었고 동시에 한국인 성직자의 증가、교회의 헌신적인 구제활동 등으로 말미암아 한국교회는 50년대 후반기에 유례없는 개종의 전성기를 맞았다. 이렇게 교세가 급속히 신장함에 따라 62년 3월 한국에 교계제도가 설정되기에 이르렀고 이에 따라 노 주교는 대구ㆍ광주교구장과 함께 대주교로 승품되었다.
이렇게 한국교회를 자립능력을 갖춘 성숙된 교회로 끌어 올린 데는 노 대주교의 공로에 힘입은바 컸다고 할 것이다. 62년은 제2차「바티깐」공의회를 위해서도 중요한 해가 되었다. 65년까지 해마다 공의회가 참석한 노 대주교는 공의회의 적응이라는 변화의 필요성과 요청에 따라 교회의 장래를 젊은 후진에게 넘기기 위해 67년 3월 서울대교구장직을 사임하는 용단을 내리고 곧장 안양 성 라자로마을로 내려와 나환자의 아버지요 벗으로서 여생을 마쳤다.
노 대주교는 한국교회사의 주역으로서 역사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은퇴 후에도 특히 일기를 계속함으로써 그 역사를 증언하고 그 자료들을 남기는 중요한 일을 잊지 않았다.
노 대주교의 일생은 분명히 한국교회사에 큰 章을 남겼다. 이제 그의 서거로 우리는 한국천주교2백년의 한 시대가 막을 내리고 선교 3세기를 향해 우리에게 중대한 임무가 주어졌음을 더욱 실감하게 한다. 전통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한 올바른 교회의 발전이 있을 수 없음을 생각할 때 우리는 노 대주교가 한국교회사와 민족사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하루빨리 정립해야 할 줄로 생각한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노 대주교의 공적은 잊혀 지지 않고 영원히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노 대주교의 서거에 대해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하며 삼가 그분의 천상영복을 비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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