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잊지 않고 있는 그 작으면서도 큰 소년시절의 사건은 소학교 삼학년 여름방학이 시작되던 날에 일어났다. 한 달 보름 남짓 동안 꼬마 주인들이 비워놓을 교실과 교정을 말끔히 청소한 다음 담임선생님으로부터 통신부(지금의 성적표)를 나누어 받아가는 날이었다.
그 시절의 학교성적은 지금과는 달리 알기 쉽게 갑ㆍ을ㆍ병 세 등급으로 나누어 매겨졌다. 물론 갑을병은 십간(十干)의 처음 세 글자이며 제일 잘한 과목에 갑을 주고 제일 못한 과목이 병을 준다. 일이학년때는 그런대로 갑이나 을을 맞아왔다. 그러나 그날 받은 통신부에는 보기도 사나운「병」자가 하나 적혀있었다. 「병」자를 본 순간 엄한 아버님의 얼굴이、그리고 회초리가 눈앞에 떠올랐다.
급우들은 왁자지껄하게 떠들면서 삼삼오오 교문을 나갔다. 그러나 내 발은 좀처럼 떨어지질 않았다. 같은 반에 먼 친척벌이 되는 나이배기 친구가 있었다. 그는 논마지기께나 지닌 자작농가의 둘째 아들이었다. 공부는 잘했으나 꽤 부잡스러운 편이었다. 학교오가는 길에 곧잘 마당이 넓은 그의 집에 들러 딱지치기도 하고 구슬 따먹기도 하던 코흘리개 친구이기도 하였다.
나의 딱한 처지를 알게 된 그는 나를 안심시키기 겸 위안하기 겸 그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지금 생각해보아도 어지간히 고마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여름반찬에 보리밥을 찬물에 말아 배를 채웠다. 그리고나서 그는 이렇게 제안하였다. 『내 형 방에는 잉크를 지우는 물약이 있으니 그 약으로「병」자를 지워버리고「갑」자로 고치자』는 것이다.
나보다는 그래도 세상일에 밝은 형뻘이 되는 그의 제안을 별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 다만「갑」으로는 못 고치겠고「을」로 고치겠다는 것이 내가 내세운 조건이었다. 고쳐놓고 보니 그럴듯하였으나 마음은 별로 시원하지 않았던 것을 기억한다.
집에 돌아와 내 딴에는 태연스러이 그 통신부를 아버님께 바쳤다. 둘로 접어진 공책크기만한 통신부를 펴보신 아버지께서는 무언가 괴망스럽다는 표정을 지으셨다. 이윽고 그 을자를 손가락으로「딱」짚으시면서 어찌된 것이냐고 물으시는 것이 아닌가. 작은 가슴이 철렁 내려않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심판의 순간이 온 것이다. 따로 기억은 없으나 부들부들 떨었을 것이 분명하다. 나는 어이없이 불과 몇 시간 전에 저질렀던 일을 모두 말씀드리고 말았다. 아버님은 의외로 노(怒)하시지 않았다.
철없던 시절、까마득한 옛 이야기일 뿐이지만 그 기억을 떠올릴 때면 영락없이 눈앞은 캄캄해지곤 한다.
사실 인간은 넘어질 수밖에 없는 나약한 피조물에 불과하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넘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일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는 같은 잘못으로 넘어지지 않도록 노력할 때 참 인간의 모습은 드러나는 것 같다.
40여년전、아버님께서는 못난 아들이 다시는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것을 바라고 아니、확신하고 계셨던 모양이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