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친한 친구와 교우 몇사람 그리고 집안 식구를 빼놓고는 거의 모두가 나를 빈틈없이 치밀하고、정확하고、생각이 차분한 사람으로보는 모양인데 이는 그다지 정확한 판단이 못된다. 나는 남들이 보듯이 치밀하지 못하고、정확하지도 않고 또 차분한 편도 아니다. 나는 내가 많은 일을 건성건성 해치우고、생각도 대충대충하고、또 곧잘 덩벙대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다음 두 사건은 많은 사건 중에서도 내가 얼마나 덤벙대면서 사는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9年전 꼭 이맘때「마닐라」에서 학회가 열린 일이 있었다. 이리저리하여 만든 論文을 제출한 것이 상대방 마음에 들었는지 접수가 되어 그 모임에서 발표를 하게 되었다. 지금은 좀더 바빠졌지만、그 무렵에도 따로 남는 시간이란 별로 없이 뛰어다니곤 했다. 그래도 출발 전날 학회에서 사용할 슬라이드를 알뜰하게 준비하여 책상 한복판 눈에 잘 띄는 곳에 놓아 두었다. 퇴근길에 집으로 가져갈 셈이었다. 옷가지가 들어있는 짐을 맡기고 나니 작은 손가방 하나뿐인 홀가분한 차림이 되었다.
물론 마음은 더할 수 없이 신이 났다. 비행기가 떠나기까지 한참 여유가 있어 배웅나온 친구와 차를 마시게되었다. 『이번에는 무엇을 발표하나?』『아、우리나라에서 문제가 되는 牛乳소화기능 장애의 X선 진단에 관해서 몇마디 하기로 되어있어』하면서 무릎위에 있던 손가방 속을 뒤져 보았다. 『어어 없네!』『무엇이?』『슬라이드 말이야』『슬라이드라니?』『학회에서 사용할 슬라이드 말이야』나는 잠깐 失禮를 하고 공중전화통으로 뛰어갔다. 병원에 전화를 걸어보니 슬라이드상자가 책상 한복판 눈에 바로 띄는곳에 놓여있다는 것이었다. 기가막힌 일이었다. 발을 동동 굴려 보았지만 어쩔수 없는 일이없다.
결국 그 친구에게 부탁하여 다음 다음날 비행기편으로 슬라이드가 뒤따라와 위기를 모면할수 있었다.
또 다른 사건은 일본에서 겪었다. 독일에서 한동안 지내다가 돌아오는 길에 경웅대학 교수 한분을 만나기 위해 東京시내 한 호텔에 묵게 되었다. 투숙절차를 밟는데 여권번호가 필요했다. 웃저고리 안 호주머니를 더듬는 순간『아차』소리가 나왔다.「하네다」空港에 여권을 놓고 온 것이었다. 옆에 서 있는 사람들이 알세라 또 공중전화통으로 뛰어갔다.
두꺼운 전화번호부를 한참 뒤져 번호를 찾은 다음 공항안내를 불러냈다.
입국수속을 밝으면서 여권을 공항에 두고 왔다하였더니 이름을 물었다. 잠시후 그곳에 여권이 잘보관되어 있다는 대답이 들려왔다.
나는 아무소리없이 호텔문을 빠져나가 공항으로 가는 모노레일 열차에 몸을 실었고 여권은 내손으로 돌아왔다.
지금 생각해도 기가 막히고 아찔한 실수들이지만 그 때문에 나는 나혼자만이 웃을 수 있는 추억거리를 풍부하게 저장하고 있다. 이「이실직고」로「나는 치밀하고 정확한 사람」에서「덤벙이」로 낙인 (?) 이 찍힐것은 분명하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회심의 미소를 짓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즐겁기만하다. 이 글 때문에 한 사람이라도 한번쯤 더 웃는다면 그건 분명 유쾌한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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