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작은 순례의 길을 떠났다. 피정단원들은「주님의 길」이라는 목적은 같았지만 각기 다름대로의 길을 설정하고 흩어졌다.
「피정의 집」에서 밖으로 나온 나는 세갈래 난 길에서 잠시 어디로 갈까 망설였지만 그 분께 맡겨 드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처음 내가 들어 선 길에서 만난 것은 아주 작은 폭포였다.
나는 그 물소리를 들으면서 기도를 드렸다.
『지난 날의 나의 罪를 씻으시어, 새롭게 하소서』라고.
다음은「성모상」을 만났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라는 그분의 응답이 내게 들려왔고 나는 무릎을 꿇으며, 어머니의 아름다우신 모습을 나누어 주십사 청했다. 돌계단을 내려와 길을 따라 걷는데, 큰 나무를 만났다.
주렁주렁 열매가 달렸는데, 한 개만 떨어져 땅에 구르고 있었다. 『하느님, 당신의 나무에 꼭 붙어서 익을 수 있는 열매가 되게해 주소서』
다음에는 성녀 소화 데레사상을 만났다. 장미앞에 하얀 모습으로 계신 그분은 어린이의 영혼이 되고자 얼마나 많은 고통을 행복과 기쁨으로 바꾸셨는가. 『하늘나라는 어린이를 위한 곳입니다』라는 그 분의 말씀을 묵상해 보았다.
길을 계속 걷는 나. 시간 시간이 당신과의 진정한 만남일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다른 길들을 둘러본다. 저 길에서는 내가 어떤 만남과 생각을 했을까. 아니, 돌아 보지 말자. 내가 지금 걷는 길에도 하느님은 언제나 계시다.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에서나, 내가 가려 했던 다른 길에서나 나의 자유의지가 그분을 거부한다면 나는 실패하고 만다. 내가 나의 마음을 비울수록 얼마나 다정하게 나를 방문하시는가. 감사하옵니다, 아버지!
아직도 기쁜 마음으로 걷는다. 빨갛고 큰 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향기를 맡아보니 아무 내음도 나지 않았다. 나는 순간 생각하였다. 빨간색은 세속적인 사치였고, 큰 꽃은 세속이 부러워하는 명예와 부귀라고. 결코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않는 지혜를 구하며, 눈에 띄지 않는 꽃이라도, 소박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며 살 수 있다면 행복한 삶이라고.
이번에는 숲에 세워진 14처 동상을 만났다. 동상을 기증한 분들께 축복을 빌며, 십자가의 길에 들어섰다. 여태까지의 작은 순례는 아스팔트 길을 따라간 편안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진정한 고통이 아픔을 침묵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명에로의 길이다. 돌도 많고, 습기가 축축하고, 양말까지 뚫어졌다. 하느님을 나의 하느님으로 모시기 위하여, 그분의 영광만을 바라는 안이함을 극복하며, 영광이 있기까지 그리스도의 수난이 있었음을 상기해보았다. 꽃을 찾았지만 거의 보이지 않았다. 외형적인 아름다움은 느끼지 않았지만, 숲 전체에서 묻어 나오는 흙의 향이나 나무냄새는 보이지 않게 깊이 내면화 되어야 하는 교회나 신자들의 모습을 각성시키는듯했다. 그렇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가시적인 것이 아니라, 승화된 영혼의 심연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13처에 이르자 숲이 거의 끝나면서 햇살이 비쳤다. 고통후의 영광!
14처는 환했다. 이름모를 흰꽃들이 잔잔한 물결을 치며 흔들리고 있었다. 나도 왠지 감격하며 무릎을 꿇고 노래를 불렀다 기쁨과 영광이 있기까지의 십자가의 길의 의미를 새길 수 있었던 값진 시간에 감사드렸다.
천천히 발길을 옮기며, 마지막으로 나환우들의 아버지이신「다미안 신부님」앞에섰다. 외로우셨던 분, 하지만, 사랑 때문에 행복하셨던 몰로카이섬에서의 희생에 깊은 경의를 표하며, 죽은 영혼을 위하여 구원을 비는 기도를 바치며 소외된 자들을 바라볼 수 있는 자신이 되도록 다짐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