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산에 사는 나는 지하철로 출퇴근을 한다. 지하철 출퇴근은 여러 장점이 있지만 나에게는 유독 진정 마음으로 사랑하는 장점이 따로 있다.
내가 타는 서울 지하철은 3호선. 우리 동네에서 경복궁역 구간까지 40분이 걸린다. 이 시간동안 나는 가족, 친구, 동료 등 모든 아는 사람들로부터 온전하게 격리된다. 「타인」의 숲속에서 갇히는 것이다. 이 숲속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고독해진다. 그리고 생각은 깊어진다.
오늘 쓸 사설의 소재 등 당면한 일정들이 우선 머리 속을 오간다. 그러다 점차 생각은 돛대를 잃고 표류하기 시작한다. 예기치않게 아득한 기억들이 버려진 섬에 닿기도 한다. 그럴 때면 어릴적 같은 반 짝꿍의 기계충 먹은 머리 모습, 자식없이 수절하며 50년을 시집 귀신만 모시다 돌아간 백모 하회 유씨가 무섬(경북 영주 수도리) 큰집 안방에서 뱉아내는 해소병 기침소리, 고교시절 종로3가의 파리제과에서 맡던 고로케 냄새와 만나기도 한다.
몸은 지하의 궤도에 묶여있지만 사유는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넘어 항해를 한다. 이렇게 생각의 배에 나를 맡겨 두지 않을 때에는 책을 읽는다. 그도 아니면 눈을 감고 꾸벅꾸벅 조는 승객의 대열에 가담한다. 지하철에서 나는 고독과 자유를 한껏 맛본다.
그러나 가끔「조폭」들을 만나면 나의 소중한 고독과 자유는 산산히 부서진다. 출근길에 주로 나타나는 이 조폭들은 유치원서부터 초중고교, 대학까지의 학생들이다. 서울지하철 3호선의 역 주변에는 서대문 독립공원, 경복궁, 국립중앙박물관 등 역사 유적지나 문화공간들이 많다. 학생들은 이곳으로 단체 견학을 가는 것이다. 특히 봄철이나 가을철에는 이틀이 멀다하고 이들을 만난다.
이들은 반드시 3~6명 단위로 뭉친다. 그리고 반드시 쉴새 없이 떠든다. 웃고 소리지르고, 어떤 학생들은 비명을 지른다. 전동차 안은 삽시간에 난장판으로 변한다. 유치원생에서부터 대학생까지, 남녀 공히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예외가 없다. 나와 다를 바 없이 하루의 전쟁터로 가면서 생각하거나, 책을 보거나 졸던 승객들은 임전태세 준비 시간을 완전히 망친다.
이들은 남을 배려해야할 때 폐를 끼치고 있다. 절제해야 할 때 방만해지고, 말을 참아야 할 때 마구 말을 해대고 있다. 말하지 말아야 할 때 말하는 버릇이 들면 필시 말해야 될 때 말을 못하기 마련이다. 자기 조절훈련은 커녕 안하무인(眼下無人)의 자세만 한창 훈련한다. 더욱이 문화공간에 견학하러 가면서 반문화적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지하철 3호선 뿐이겠는가. 서울의 다른 지하철 노선도, 부산과 대구 광주의 지하철도, 공연장이나 식당도 결국 사회 어디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공동체 의식 회로」에 지속적으로 같은 코드가 입력되고 있는 이상 이들이 어른이 되는 미래에도 역시 그럴 것이다. 가끔씩 정부의 고위관계자들과 이런 얘기를 화제로 삼기도 하지만 그들은 「천하대세」와 상관없다는 듯 제대로 듣는 기색이 아니다. 선생님들도 「우리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이고 부모들은 성적과 상관없는 일이어서 그런지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세계 어느나라에서도 이런 관경을 본 적이 없다. 7년 전이던가, 일본에서 토요타 자동차회사를 방문하고 신칸센 편으로 동경에 갈 때의 일이다. 플챗홈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초등학생 수십명이 다가와 나도 모르게 바짝 긴장이 됐다. 조만간 벌어질 전동차 안의 소음이 귀에 쟁쟁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다른 승객들이 다 탄 뒤에 줄을 지어 승차했고 동경에 도착할 때까지 옆에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침묵으로 일관했다. 나는 오히려 머리끝이 쭈뼛해지는 것을 느꼈다.
「일본에서 개인은 기계부속과 같다더니 아이들을 이렇게까지 기를 죽이다니…」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쨋든 이야기는 분명해진다. 두 사회의 실체가 어떻게 다를지는 문화 수준이 아니라 경쟁력을 말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기본이 안돼 있고 자기 조절을 하지 못하는 사회 구성원들이 어떻게 재화를 많이 창출하고 남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을까. 천하대세와 전혀 상관 없는 듯이 보이는 서울 지하철의 광경이 실은 미래의 천하대세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른들의 탓이다. 지연 혈연 학연 등 사적 관계에서는 간이라도 내어주고 법도 어기면서 공동체 규범은 외면하는 것이 우리 기성세대의 사는 모습니다.
이러한 「울타리 안의 예법과 생존 방식」이 아이들에게 그대로 세습되고 있다. 지난 연말 타계한 미당 서정주 선생이 『나라가 잘 되려면 어린이를 잘 키우라』고 유언처럼 밝힌 것은 그런 연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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