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년동안 우리 사회에는 여러가지 난리가 연거푸 일어났다. 전반적인 경제난에다 금융대란, 통신대란, 의료대란 등등.
온갖 난리 중에서도 의료대란은 특히 심각한 것이었다. 생명의 존엄성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생명이 왔다갔다 했으므로 진짜 전쟁이나 다름없었는데 보기에 따라서는 실제 전쟁보다도 더 잔인했다.
전쟁터에서도 환자만큼은 보호하자는 윤리가 있는 터에 이를 구현해야 할 의사들이 환자의 목숨을 볼모로 잡고 전쟁을 벌인 것이다.
물론 의사들의 주장에는 이런저런 명분과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 정부가 「개혁」의 성과에 급급한 나머지 준비가 덜 됐는데도 서둘러 의약분업을 강행한 탓에 여러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었다. 또 이유중에는 의사의 「밥그릇」이 작아지고 사회적 지위가 단순한 「의료일꾼」으로 떨어지는데 대한 두려움도 큰 것이었다.
아무튼 이 대란은 세계 의료사에 길이 기록될 것이다. 그건 역시 전국의 의사들이 총단결해 「어떤 가치로도 맞교환할 수 없는 생명」을 볼모로 장기전을 감행했다는 점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투쟁했어야 하느냐는 반문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요구사항을 관철하기 위해 생명가치를 저버리는 , 최후의 금기사항을 깨며 죽음의 문법으로 투쟁하지는 말았어야 옳다고 본다.
설사 당장의 투쟁이 승리한다 하더라도 우리 의료셰의 철학적 수준과 자기 회한, 사회적 불신 등에서 길게, 정신적으로 볼 때는 완패하게 돼있다. 훨씬 덜 효율적이고 긴 시간이 걸리더라도 다른 방법으로 투쟁했어야 한다. 이 와중에서 종교계 병원들도 쉽게 동조했다. 대형 종교계 병원들이 이탈한다면 투쟁 전선이 와해돼 파업자체가 어려워지기 때문이었으리라.
파업에 동참하는 가운데서도 조금이라도 더 환자를 돌보려는 노력이 있었다는 것도 안다. 그렇더라도 역시 아쉬운 대목이다.
일반병원이나 종교계 병원이나 사람들을 살리자는 이념에 큰 차이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종교계 병원에는 신앙으로 인해 생명의 존엄성에 대해 일반병원과 자세가 다를 수 밖에 없다. 우리 교회의 가톨릭 중앙 의료원의 이념도 「치유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재현하여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살피는데에 있다」는 것이다.
치유자이신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던가. 당시 율법으로는 안식일에 일을 할 수 없었지만 예수님은 환자를 치료해주신다.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을 해꼬지할 빌미를 찾으려고 「법에 어긋나지 않느냐」고 묻자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고 잘라 말씀하신다.
또 불가(佛家)의 설화에 「독침의 비유」란 것이 있다.
어느 밀림속을 한 나그네가 지나가다가 어디에선가 날아온 독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곧 인근 부락 사람들이 몰려와 쓰러진 나그네를 둘러싸고 논란을 벌인다. 「이 독화살은 누가 쏜 것일까」「독화살의 독은 어떤 것이며 얼마나 치명적일까」「이 나그네는 누구일까」등등. 이때 부처님이 나타나신다. 그리고 한 말씀을 하시는데 「그만 떠들고 우선 사람부터 살리고 보아라」는 것이었다.
두가지 이야기 모두 생명의 우선한다는 것, 그리고 생명 살리기를 위해서는 「행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주고 있다.
그렇게 볼 때 다른 종교들도 마찬가지지만 교회 병원 뿐 아니라 교회자체의 자세에도 아쉬움이 남는다.
지난해 8월 정진석 대주교께서는 의료사태 관련 호소문을 발표하셨다.
정대주교께서는 이 호소문에서 「의사는 환자들을 위한 존재」라고 강조하셨다. 그리고 치유자이신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가톨릭교회로서 사태를 우려하고 해결노력을 촉구하셨다.
그러나 이 호소문이 나온 뒤 교회 안에서 호소문의 정신대로 사태해결에 도움을 주려고 「행하는」노력을 얼마나 했던가. 의사와 약사, 정부간의 이해관계 때문인지 이러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한 상태가 아니었던가 보인다.
어떤 형식, 어떤 차원에서라도 의사나 약사, 정부측과 직접 대화하고 또 이들을 설득하려고 현장에서 애를 썼어야 옳았다. 정치문제가 아니라 교회이념의 본령에 있는 생명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제 의료대란은 끝나고 난리통의 환자고통은 정리됐다. 하지만 자주 그렇듯이 때늦은 자기 반성의 고통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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