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이 은인이다! 손님이 은인이다!
나는 이 소리를 마치 주문이라도 외우듯 중얼거리며 부지런히 몸을 놀린다. 물론 아내도 같이 부지런히 몸을 놀린다. 나는 잠옷 바람이다. 아직 세수도 못했다. 이제 겨우 20분 남았다. 20분 후에는 조금 스스러운 손님이 도착한다. 어지럽게 널려 있는 저것들을 20분 안에 다 정리할 수 있을까.
전에 성대(成大)에 같이 있었던 L교수 내외가 오기로 약속된 시간이 각일각 지나가고 있다. 어쩌다가 L교수 내외가 시간 전에 (한 5분 쯤 전에) 도착이라도 한다면, 수습 불능의 사태가 벌어진다. 평생 걸려 쌓아온 나의 ‘이미지’가, 보통사람이라는 나의 인상이 완전히 깨져버린다. 그리하여 나는 ‘아무래도 성격에 결함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여간 지금은 이런저런 딴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손님이 은인이다!’ ‘손님이 은인이다!’ 하며 나는 정리의 마지막 절차에 박차를 가한다.
다행히 L교수는 한 5분 쯤 늦게 도착했다. 나는 오히려 여유를 부려가며 정중하게 손님을 맞는다. 둘러보니 나의 침실 겸 서재와 마루(요새는 거실이라고들 한다)가 조촐하게 정리가 돼 있다. 걸레질까지 했으므로 마루가 먼지 하나 없이 반들거린다.
부정기적이긴 하지만 가끔 오는 손님 덕분으로 나는 이렇게 집안을 정리하고 청소하여 사람 사는 곳에 합당한 최소한의 모양을 되찾는다.
나는 내 생활이 이렇다는 것을 하나도 숨길 이유는 없다. L교수가 도착하기 직전의 상황을 손님들에게 다 털어놓는다. 아내가 ‘손님이 은인이다! 손님이 은인이다!를 연발하며 제법 눈부시게 정리의 마무리를 했답니다.’ 하고 내 말을 거든다. 이 말을 들은 L교수도 ‘손님이 은인이다! 하하! 이거 명언입니다!’ 하며 크게 웃는다.
대충 보면 사람은 두 유형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늘 생활의 주변을 깨끗하게 정리해서 깔끔하게 살아가는 사람. 그리고 정리엔 전연 관심이 없어 되는 대로 쌓아놓고, 하고 싶은 일에만 골몰하는 사람.
전해들은 얘기인데, 전에 나의 본당에서 근무하셨던 어떤 신부님은 참으로 정리의 달인이었다고 한다. 그분이 쓰는 방엔 구석구석이 나무랄 데 없이 정리돼 있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가령 필통을 열어보면, 그 안에는 보기 좋게 깎아놓은 연필이, 길고 짧은 길이의 순서대로 쭉 정렬해 있다고 한다. 과연 정리의 달인이다. 정리하지 않고 되는 대로 살아가는 패의 대표로는 나 같은 사람이 뽑힐 수밖에 없다.
내가 무조건적으로 정리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해도 해도 따라갈 수가 없는 정리에게 두 손 든 것뿐이다. 아무래도 정리를 방해하는 그 패거리의 세력이 나보다 강해서 당해낼 수가 없다.
이실직고 하겠다. 나의 방 (침실과 서재 겸용의)은 얼핏 보면 잡다한 쓰레기의 총 집합장이다. 내가 잘 수 있는 공간 (나는 침대는 사용하지 않는다.)을 빼놓고는 그 둘레에 메모지, 보다 만 책, 볼펜, 모기 쫓는 에프킬라, 안경, 확대경, 칼, 가위, 시계, 약 가방, 망치 등 연장, 풀, 스크랩 북 등 끝도 없는 품목들이 꽉 차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에도 질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팔을 뻗어 곧 잡힐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은 나에게 그만큼 소중한 것이다. 일어서서 찾을 수 있는 거리에 있는 것은 나에게 중요도(重要度)의 순번이 떨어지는 것들이다. 나는 이제 한숨 섞인 말투로 ‘인생은 정리와의 싸움이다.’ 이렇게 중얼거린다. 학자들은 그 세력을 ‘엔트로피’라 말한다. 나는 ‘반정리세력(反整理勢力)’이라 하겠다.
어쩌다가 책꽂이 뒤쪽을 들여다보았더니 먼지의 꽃이 탐스럽게 피어 있다. 그야말로 ‘악의 꽃’이다. 그렇구나! 먼지와의 공생(共生)이다. 같이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배권(支配權)은 저쪽에 있다.
아내가 하는 말이다. 지금 L교수댁에 전화를 걸었더니, L교수 부인이 하는 말, 지금 남편은 ‘손님이 은인이다! 손님이 은인이다!’ 하며 청소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다고 한다. 그 댁에도 스스러운 손님이 오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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