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가는데 길가에 제법 잘 생긴 전기스탠드 하나가 버려져 있다. 고장 난 물건 같지도 않다. 필시 주인이 쓰다가 싫증을 내 버린 것이다. ‘불쌍한 것, 무정한 주인을 만난 모양이구나’ 나는 중얼거리며 그것을 주워다가 나의 집 마당 비어 있는 곳에 잘 놓아둔다.
그때부터 그 물건은 내가 마당에 차려놓은 ‘물질 고아원(物質孤兒院)’ 의 고아다. ‘편히 쉬거라.’
내가 연희동에 이사오기전 응암동 집의 약 70평쯤 되는 마당은 이렇게 해서 모여든 ‘물질고아’ 들로 거의 초만원이었다. 그 시기는 대략 1970년 말부터 연희동에 이사 온 2007년까지다.
역시 길에서 주은 가로 80cm 세로 25cm쯤 되는 양은 판을 잘 펴서, 정으로 때려 음각(陰刻)하여 ‘응암동 물질고아원’ 이라는 제법 의젓한 간판을 만들어 처음에는 대문에 달았었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문을 두드리고는, ‘고아원 차리셨습니까?’ 하고 하루에도 여러 차례 묻는 바람에 견디다 못해 나중에는 그 간판은 울안에 옮겨서 걸었었다.
그래도 소문은 퍼져, SBS의 ‘순간 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 팀이 한 사흘 법석을 떨며 촬영을 하고 방영하는 바람에 요새도 가끔 그 인사를 듣는다. 2007년 연희동에 이사 오는 바람에 ‘응암동 물질고아원’ 은 막을 내렸다.
그 당시 내가 마음속으로 실망을 느꼈던 것은 나에게 그 화제를 꺼내는 사람들은 열이면 열 거의 예외 없이 “요새도 ‘물질박물관’ 잘 있습니까” 하는 질문이었다. 아무리 ‘고아원’을 강조해도 소용없다. 얼마 후에 다시 물을 때는 영락없이 도로 ‘물질박물관’ 이다. 더러 ‘물질고물원’ 으로 표현하는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나에게 시까지 써서 보내 왔는데 그 시의 제목이 ‘물질 박물관’ 이었다. 시를 쓰지나 말 일이지!
‘고아원’과 ‘박물관’은 내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이 그 개념과 구실이 천양지차다. ‘박물관’은 특정분야를 연구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참고 자료가 될 만한 죽은 (이미 옛 것이 된) 물건들을 정리 전시하는 곳이다. ‘고아원’ 은 오갈 데 없는 불쌍한 어린이를 모아서 보호하고 키워주는 곳이다. 이 둘은 서로 전연 공통점이 없다. 다만 이 ‘고아원’은 산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데 거기에 생명이 없다 싶은 ‘물질’이 결합되니까 얼떨떨할 수도 있겠다. ‘물질 고아원’ 은 물론 개념의 비약과 다소의 상상력이 필요하다. 그게 그렇게 어려운가.
흔히들 현대(20세기와 21세기)는 물질만능의 시대라고 말한다. 또 물신(物神)의 시대라고도 말한다. 정말 그러한가?
나는 생각을 달리 한다. 현대야말로 미증유의 물질학대의 시대다. 그 증거로 늘 범람하는 저 쓰레기를 보면 알 수 있다. 길에 버려지는 저 ‘물질 고아’ 들을 무심히 볼 일이 아니다. 고장이 난 것도 아닌, 멀쩡한 물건을 마구 버린다. 유행이 바뀌었다고 버린다. 새 때가 가셨다고 버린다. 망치로 몇 번 때리면 다시 쓸 수 있을 텐데, 그것이 귀찮아서 버린다.
음식 쓰레기가 넘치는 광경은 처참하다.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이 굶주리고 죽어가고 있는데, 먹다 남은 음식을 마구 버린다. 이 얼마나 극단을 가는 부도덕인가.
특히 종이의 낭비에 이르러서는 끔찍하다는 말 가지고도 안 될 정도다. 숲 속에서 평화스럽게 살고 있는 나무 가족을 마구 학살하여 종이를 만들어 저렇게 낭비한다. 그리고는 종이의 소비량이 많아야 문명국이니 뭐니 떠들고 있다. 현대는 거대한 범죄 집단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동물애호가 협회’ 다 뭐다 해서 동물에게도 애정을 쏟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물질의 딱한 처지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아무리 학대해도 묵묵히 참고 받아만 주는 물질이 그렇게 만만한가. 말 없는 물질의 저 무표정한 모습이 오히려 섬뜩하지 않은가. 이 시대의 환경오염이 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요새 우리가 겪는 대형 참사가 참다못한 물질들의 반격이 아니라고 단언할 사람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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