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입교가 늦은 편이다.
요즘 자주 만나는 교우들 중에서는 나같은 「초짜」를 찾기가 힘들다. 천주교 재단인 서울 동성중고교를 다녔지만 막상 세례를 받은 것은 이 학교를 졸업하고도 23년이 지난 1995년. 미국 클리블랜드 대학에서 연수를 받을 때였다.
클리블랜드 교민들의 본당은「김대건 안드레아 한인 천주교회」한곳 뿐이었다. 나는 이 곳에서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6개월 동안 예비신자 교리공부를 했다.
클리블랜드의 겨울은 길기도 하지만 눈도 많았다. 집에서 성당까지 자동차로 걸리는 시간은 최소한 30분. 무릎까지 쌓인 눈을 헤치고 당도해서는 사제관 지하교실에서 다른 예비신자 대여섯명과 손을 호호불며 오순도순 공부를 했다.
그처럼 순진무구한 열정으로 공부하고 기도하는 날이 다시 올 수 있을까.
당시 나는 미국에 가기 전 이런 저런 일로 심신이 지칠대로 지쳐있었다. 어디 큰 언덕 같은 곳이 있으며 나를 통째로 기대고 싶은 심정 뿐이었다. 해외연수도 실상 그런 심정에서 택한 대안이었다. 그런 터에 교민 한사람이 신부님께 말해 예비신자 교리반을 만든다, 어쩐다 하면서 나의 등을 교회 교회 안으로 떠밀어 넣었던 것이다. 절박하게 무언가 새 희망을 갈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비신자 교리과정은 마른 목에 샘물처럼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더라도 그처럼 작은 교회, 따뜻한 정을 주고 받는 교우들이 아니었다면 그 시절의 기억이 꺼지지 않는 등불처럼 지금 내마음을 밝히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주일 미사 때면 100~200여명의 교우들이 미사에 참례하는데 미사 후 친교시간은 정말 다정다감한 분위기였다. 이들은 평소에도 서로 돕고 위로하고, 상의하면서 말 그대로 형제애를 나누며 살고 있었다. 내가 부활절에 세례를 받으면서 이들로부터 받은 축복은 마음 깊이 전해오는 것으로서 그런 감동은 생전 처음이었다. 귀국하기 전까지 1년 동안 그곳 교우들과 다정하게 지낸 이야기들은 수없이 많다.
귀국한 뒤 나는 서우에서 신도시로 이사를 했다.
그런데 지역의 본당으로 가보니 숨이 탁힐 지경이었다.
엄청난 수의 군중이 이리 저리 몰려다녔고 신부님과 수녀님에게 말을 걸려니 저마다 「바쁘니 나중에 이야기하자」는 것이었다. 교적을 옮기는 일 때문에 사무실에 가서 문의를 하려는데 담당자가 없다면서 다음에 오라고 하기도 했다. 응대하는 분들의 표정도 지극히 사무적이었다. 새 성당을 짓는다며 성당측이나 교우들이나 시도 때도 없이 「돈, 돈」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사정은 이해할만 했다. 워낙 많은 인구가 밀집한 아파트 촌의 신도시이다보니 그런 일들이 생기지 않겠는가.
그러나 고백하자면 나는 한동안 본당을 외면했다. 그래도 본당에 갓어야 마땅한 일이고 분명한 나의 잘못이었지만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것은 어쩔수 없었다. 그리고는 서울 도심의 회사 부근에서 붐비지 않는 성당을 찾아 미사에 참례했다. 작고 조용하고 따뜻하기만 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한 나로서는 그 충격을 이기기 어려웠던 것이다.
본당에서는 나라는 존재, 나의 정체성이 흐려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또 이래서 교회의 대형화와 물량화가 쉬는교우를 증가시키는 것은 아닐까 하고 추측을 하게 됐다. 그리고 사회적 소회 계층이라면 이런 와중에 냉담할 가능성은 더욱 많겠구나, 발길을 돌린 소외계층은 사이비 종교집단일지라도 자신을 좀 더 따뜻이 맞아주고 삶의 고통을 위로해주는 곳을 택하지 않을까, 신자들을 교회로 부르는 것은 결국 교리나 신학이 아니라 친교가 아닐까….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점차 알고보니 이런 나의 개인적 체험과 거기에서 비롯한 나의 추측은 이미 오래 전부터 범교회적 문제점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었다. 그리고 이런 문제들 때문에 소공동체 운동도 전개돼오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시간에도 교회의 대형화는 중단없는 전진을 하고 있다. 건축비가 수백억원이 들어가는 본당을 세우려는 곳도 있다고 한다.
도대체 신자들에게 그 큰 부담을 주면서 왜 그렇게 해야하는지, 그런 성당일수록 건축미보다는 많은 인원을 수용하는 기능에 초점이 맞춰지게 마련이다. 더욱이 우리나라에서는 교회건축 전문가들이 적어 건축비만 날리고 엉터리 건물을 짓는 일도 흔하다고 한다.
역시 가장 큰 문제는 대형화 물량화가 필연적으로 소외의 그늘을 깊게 한다는 점이다.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정반대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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