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지막하고 단조로운 목소리로 차근차근 타이르듯, 설득하듯, 부탁하듯 교리를 가르치시던 신부님. 근엄하면서도 부드럽고, 편하고, 깊고 조용한 생명력을 지니셨던 신부님. 가끔 하늘을 우러러보듯 천장을 바라보며, 하얗고 가지런한 이가 곱게 드러나게 해맑은 미소를 소리 없이 지으시던 신부님. 이것이 지금으로부터 43년 전, 명동 성모병원에서 한참 정신없이 일하던 시절에 뵙던 진성만 신부님의 모습이다.
병원 원목실에 계시던 김 에우프라시아 수녀님의 인도로 교리공부를 시작했다. 점심시간을 타 명동성당 뒤편에 있는 옛 개성초등학교 교정 한 외진 곳에 있던 사제관에서 반년 동안 교리를 배우러 다녔던 일이 회상된다.
일주일에 한 번씩, 확실치는 않으나 매주 수요일이었든 것으로 기억한다. 병원 앞뜰 성모동굴 옆, 가파르고 좁은 기역자 샛길 계단을 올라가, 대성당 앞 광장을 가로 질러 서편 뜰을 지난다. 그리고 수녀원 앞에서 두 번 왼쪽으로 꺾어 돌면 사제관이 있었다. 초인종을 누르면 현관문이 열리고 집안에서 신부님이 기다리고 계신다. “신부님. 저 왔습니다.” “왔어요?” 그리고 교리공부가 시작된다.
그렇게 신부님을 만나 신앙고백, 십계명, 주기도문, 성모송 그리고 대영광송 같은 수많은 것을 배우고 외우고 또 이런 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했던 일이 이렇게 뇌리에 새겨져 있다. 하늘은 어찌하여 사람에 기억이라는 기막힌 장치를 마련해 두고, 지나간 것을 되새기고 내일을 가늠하면서 시공을 넘나들게 만들어 놓았는지.
그때, 나는 성급하고 초조하게 달리면서 느슨하고 성글게 엮어진 생각에 이끌려 살고 있었을 것이다. 나날의 현실 속에 ‘크고 깊은 진리’가 꽉 차있다는 이야기를 수없이 듣고도, 설 알고 지내왔다. 신부님이 귀천하신지 벌써 삼년…. 연옥, 지옥, 천사, 천국을 깨우쳐주는 사람은 그것을 아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런 분이 나에게는 바로 진성만 신부님이셨다.
수원 북쪽 교외 나지막한 야산 속, 수도원에서 젊은 수도자들과 지내시던 신부님은 누군가가 너무도 적절하게 표현하였듯이 “묵주를 들고 왔다갔다만 하셔도 되는 작은 성인이셨다”. 그래서 어쩌다 찾아뵈면 심심할 정도였다. 돌아가시기 몇 년 전엔가, 컴퓨터를 조금 배우셨다고 그리도 기뻐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신부님의 마음은 언제 봬도 한결같이 맑고, 소박하고, 여유롭고, 따뜻했다. 하신 말씀은 언제나 간결하고 의미가 있었다. 어려운 말이나 수식어가 따로 없는 말, 그것이 심부님의 화법이었다.
신부님은 들꽃처럼 수수하고 티 없고 밝았으며, 안개 낀 숲처럼 조용하고 아늑하셨다. 그러나 가르침은 힘이 있고 생명력이 넘쳤다. 낡은 사진첩 이외에 스스로의 발자취를 남기기 위한 아무 욕망도 노력도 고민도 하지 않으셨던 분으로 기억한다. 그러기에 신부가 되라기에 신품을 받으셨고, 학원 이사장직을 맡으라기에 그 큰일을 맡으셨고, 성모병원 원목이 되라기에 묵묵히 일하는 원목이 되셨고, 남아메리카에 가라기에 기꺼이 짐을 꾸리셨다고 생각한다. 신부님은 행동으로 순명하시는 분이셨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신부님은 이따금 성 안드레아 주보성인에게 감사하면서 성무일도를 들고, 중국 황하 상류지역 파이탄에서 배에서 내리던 프란시스 치셤 신부님을 떠올리게 하셨다.
신부님은 지금 눈을 감고도 모든 것이 보이는 그곳, 귀를 막고도 기쁜 소리가 들리는 그곳, 가없이 넓어 거칠 것 없는 그곳, 바람이 맑아 절로 숨이 쉬어지는 그곳, 주림이 없어 허기가 들지 않는 그곳, 시간이 있으나 흐르지 않는 그곳, 괴롭힘이 없는 그곳에서 살고계시리라 믿는다. 그래서 이렇게 두 손을 모아 감사의 축도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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