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가톨릭성지는 대부분 순교성지다. 옛 순교의 터는 현재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기도의 터로 가꿔져 순례객들을 맞이한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성지를 순례하면서도 그곳에서 순교한 이들이 누구인지, 어떻게 신앙을 증거하다 순교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곤 한다. 심지어 죽음으로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을 측은하게 생각하거나 순교를 단순히 무서운 사건으로만 바라보기도 한다. 왜 십시일반 헌금을 모아 성지를 개발하고 또 그곳을 순례하는지, 그 의미를 되짚어볼 일이다.
순교자들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체험하고 기쁨과 평화 안에서 하느님 곁으로 돌아간 이들이었다. 그들의 행복을 나누어 받기 위해서는 기도와 실천이 필요하다. 성지는 이러한 신앙선조들의 삶과 신앙을 알고 본받으려고 노력하며, 기도할 수 있도록 마련된 곳이다.
9월 순교자성월의 길목에서 새로운 성지 단장 소식이 들려 반가운 마음을 더한다. 리모델링이라기보다는 재건축에 가까운 대대적인 공사를 거쳐 새 모습을 드러낸 서울대교구 당고개 순교성지가 그 주인공이다.
이곳 성지를 찾으면 형구돌 등 무시무시한 유물 대신 신앙선조들의 생활상을 떠올릴 수 있는 옹기 조각들을 꾸며진 단아한 성당에서 머무를 수 있다. 옹기는 선조들이 생계를 잇고, 곳곳을 다니며 친교를 나누고 전교할 수 있도록 도와준 도구였다. 피 흘리는 순교 장면 대신 ‘어머니의 품’을 떠올리게 하는 따뜻한 색감의 성화·성물들을 만나볼 수 있다. 건축가의 전문적인 기술뿐 아니라 예술가의 감성과 사목자의 역량이 총체적으로 담겼기 때문이다. 덕분에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고문을 견뎠겠냐며, 하나도 고통스럽지 않고 살아서 천상을 보았다고 고백한 순교자들의 기쁨과 행복을 더욱 가까이 느낄 수 있다. 일반인들도 순교자들의 신심과 미소를 쉽고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는, 이른바 이야기가 있는 성지여서 더욱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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