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조남철(趙南哲) 9단 하면 아마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해방 후 우리나라 바둑계를 이끌어 오늘날이 있도록 한 바둑계의 대부이자 은인이다. 한 때는 일본 바둑이 단연 세서, 바둑으로 일본을 뛰어넘는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듯싶었다. 그러던 것이 마치 기적처럼 일본을 훌쩍 뛰어넘어 지금은 우리나라 바둑이 한 중 일 동양 3국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다. 세계 랭킹 부동의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세돌 9단이 우리나라 사람이니까.
조남철 9단의 부친은 아마 숨은 애국자이셨던 모양이다. 조 9단이 바둑계에 들어서게 된 것도 부친의 배려 덕분인데, 그분은 조 9단에게 “너는 바둑으로 일본인을 이겨라. 일본인을 이길 수 있는 길은 승패가 확실하고 조작이 불가능한 바둑밖엔 없다.” 하고 말하였다 한다. 이 말은 사실이다.
권투, 축구, 정구, 농구 등 대부분의 경기가 보기에 따라서는 심판하기 나름이다. 표 안 나게 교묘히 불공정한 판정을 하여 미묘하게 승부에 영향을 미치는 심판들의 횡포를 막을 길이 없어, 관중은 속을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 관한 한 바둑만큼 선명한 경기는 없다. 반집의 차라도 승은 승이요 패는 패다. 승패에 관한 한 바둑만큼 깨끗한 경기는 없다.
일제시대(日帝時代)에 일본인 기사를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완벽하게 때려눕힌 기사가 바로 ‘살아있는 기성(碁聖)’이란 칭호를 듣는 중국 출신 오청원(吳淸源) 9단이다. 오청원은 전전(戰前) 전후에 걸쳐 주로 10번기를 통해 모든 일본기사를 선상선(先相先) 내지는 선(先)까지 바둑 치수를 고치게 하여 완벽하리 만큼 일본인 기사들을 제압했다. 일본인이 득세할 무렵 이렇게 일본인을 시원하게 때려눕혔던 사람은 오청원 말고는 없다. 일본인을 제외한다면, 우리가 오청원을 외경하는 심리에는 이러한 이유도 작용을 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100세 가까운 나이로 아직 살아 있는 오청원은 전전엔 신포석, 전후엔 이른바 ‘눈사태’ 정적이라고 불리는 정석(定石) 등 바둑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지만, 세상이 그를 잘 기억하고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바둑은 조화다’ 한 그의 명언 때문이다.
‘바둑은 조화다’ 참으로 음미해볼만한 말이다. 실리(實利)에 치우치면 세(勢)에 눌려 지게 된다. 세에만 마음을 쓰면 실리 부족(집 부족)으로 지게 된다. 이기려는 마음이 너무 앞서면 실수하게 되고, 그렇다고 너무 조심만 하다가는 기백 부족으로 위축되어 지게 된다. 의욕과 조심에도 조화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것은 바둑에 국한된 얘기만은 아니며, 인생사 일반에 널리 적용될 수 있다.
조씨 가문에서 나온 또 하나의 대 기사 조치훈 9단 (조남철 9단의 조카 항렬)은 바둑을 ‘목숨 걸고 둔다’고 했다. 정말 처절한 말이다. 바둑판 앞에서 더 좋은 수를 찾아내기 위해 기사가 노심초사하는 모습은 참으로 보기에도 안쓰럽다. 바둑은 철두철미하게 이기고 지는 경기다. 그러한 바둑의 깊은 뜻이 조화라니! 그러면 바둑은 투쟁인가, 조화인가! 나의 생각은 이렇다. 바둑은 투쟁인 동시에 조화요, 조화인 동시에 투쟁이다. 투쟁과 조화가 불가분(不可分)의 관계에 있는 하나요, 일체이면(一體二面)이다. 불연속의 연속이다. 동중정(動中靜)이다.
화제를 조금 바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구경은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자유분방한 무늬를 엮는 ‘하늘 구경’이다.
두 방향에서 근육(筋肉)처럼 생긴 무지무지한 구름 줄기가 모여와서 충돌하고 뒤엉켜 소용돌이친다. 하늘에서 벌어지는 ‘트로이’ 전쟁이다. 그러다가 일순 싸움이 그지없이 부드러운 애무(愛撫)로 바뀐다.
인생은 동시에 투쟁이자 조화다. 싸움과 다툼은 성장이요 발전이며, 조화는 평화요 형수(亨受)다. 싸움은 이기(利己)요, 평화 조화는 이타(利他)다. 싸움은 ‘에로스(肉愛)’에서 나오고 평화는 ‘아가페(博愛)’에서 온다. 하나, 이 둘도 알고보면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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