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까지 서울의 한강 가까운 곳에서 지낸 덕분에 강변 산책을 원없이 했습니다. 참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어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부끄러웠고 두려웠습니다.
강의 양쪽을 깔끔하게(?) 콘크리트로 막아 놓고, 우리가 흐르라 명령(?)한대로만 흘러야하는 비참한 처지가 된지는 수 십 년이고, 이제는 한술 더 떠 강에다 별의별 짓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 땅의 온 물줄기의 운명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 깔끔한(?) 외모와는 달리 강물의 혼탁함은 그 앞에 가까이 가보아야만 보입니다. 부끄러움이란 한강의 모습이 우리 인간과 사회의 겉모습과 그 속의 혼탁함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한강은 나를 조롱합니다. 그래서 부끄럽습니다.
부끄러움에 비하면 두려움은 숨을 멎게 하고 온몸을 굳어버리게 합니다. 그 한강이 나를 준엄하게 꾸짖기 때문입니다. 그 꾸짖음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한강은 지도상으로는 언제나 그리고 반드시 서해바다로만 흘러야 하지만, 늘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드문드문 그리고 한때지만 한강은 역류하거나 혹은 가만히 출렁거리기만 합니다. 인류의 역사가 그럴 수 있음을 잊지 말라는 듯이 말입니다.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거나, 잊고 싶은 것만 잊으면 얼마나 좋을까? 좋은 것만 기억하고 나쁜 것만 잊으면 되니까.’ 정말 좋기만 합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입력과 출력이 필연의 질서에 따라 작동하는 기계가 아니므로. 사람은 좋은 것을 잊어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교만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고통을 자초할 수 있으므로. 사람은 나쁜 것을 잊지 말아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얼마 지나지않아 똑같은 우를 범하여 혹독한 대가를 거듭 치를 수 있으므로.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함께 사는 사회도 그렇고, 그리고 한 집단 혹은 공동체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강이 역류하듯이 역사도 비록 잠시지만 역류(퇴보)할 수 있고, 때로는 출렁거리기만 할 뿐 진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잠시라고 하더라도 그 대가를 치러야 할 사람들이 겪는 고통은 수량으로 측량할 수 없습니다. 누구 말대로 “하나의 영혼이란 세계만큼이나 무한한 것이므로, 또한 흐르는 강물처럼 깊은 것이므로”. 그 역류 혹은 출렁임의 시기에 한 사람 한 사람이 겪은 아픔과 고통을 어떻게 계량화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게다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꾸려갈 힘마저 없는 보통의 평범한 사람의 그것을 어떻게 다 헤아릴 수 있단 말입니까. 멀리까지 갈 필요도 없습니다.
구한말은 일제 강점으로 퇴보했고, 해방은 한국전쟁으로 퇴보했고, 조국 근대화와 산업화는 양극화(?)로 출렁거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제 강점에, 한국전쟁에, 양극화의 구조악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영혼과 마음과 몸이 망신창이가 되었습니까. 지나간 과거의 단일 현상으로 끝난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안타깝게도 겹겹이 쌓여 그 무게를 더해가니 무섭습니다.
한강의 역류와 출렁임이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나의 오늘이 내일의 누군가에게 고통을 안겨줄 수 있다는 것이 나를 두렵게 합니다. 범위를 넓히면 오늘의 우리 세대가 내일의 세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와 회복할 수 없는 고통의 덫을 놓을 수 있음이 나를 두렵게 합니다. 오늘 우리가 온갖 미사여구로 치장한 행적들이 내일 또 다른 두터운 한 겹의 고통으로 내 후배세대를 짓누를 것 같습니다. 4대강 사업이 그렇고, 핵발전소 건설이 그렇고, 그리고 무엇보다 제주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건설이 그렇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모든 우리의 그럴듯한 행적들이 생명과 평화라는 인간의 근본 가치를 허물어뜨리는 것이어서 회복이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강을 파헤치면서 그 탐욕을 ‘사업’으로 위장했고, 핵발전소를 세우면서 그 탐욕의 욕망 위에 ‘경제성’을 덮어씌웠고, 제주 강정마을에 울타리를 치고 해군기지를 건설하려는 것은 무력으로 평화를 얻겠다는 교만까지 얹은 행태입니다다. 게다가 4대강도, 핵발전소도, 그리고 제주의 해군기지도 그 진실과 거짓을 알리지도 않지만 알려 하는 이도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 흙탕물을 만들고 있음을 부끄러워 그랬다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오늘 우리가 만든 탐욕과 교만의 늪에 내일의 세대가 허우적거리거나 말거나 알 바 아니라면 그건 결코 사람의 도리가 아닙니다. 게다가 이는 과거와 미래 세대의 것을 ‘도둑질’한 것이기도 합니다.
“일곱째 계명은 모든 피조물을 존중하기를 요구한다. 동물이나 식물이나 무생물 등은 그 본성상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인류 공동선을 위한 것들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415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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