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투명에도 사상(思想)이 있는가? 여기서는 반투명의 본질, 정도의 의미다. 반투명에 본질이 있는가? 있다. 반투명을 사랑하여 골똘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보이고 느껴진다. 이때의 기쁨은 매우 큰 것이어서 나 혼자 그것을 느끼고 누리기가 죄스러울 정도다.
내가 반투명에게 사로잡히게 된 것은 대략 1980년대 초부터였다. 그러다가 1982년 가을에 「반투명」이란 제목의 장시를 완성했다. 이 시를 쓰는 동안 나는 내내 행복했다. 오랜 시간을 들여 고치고 또 고치고 해서 겨우 완성했다.
이 시는 나의 시력(詩歷) 중기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것이어서 내게는 그만큼 감회가 깊다. 이 시를 보고 속초의 고 이성선 시인은 아낌없는 찬사를 담은 편지를 보내왔다.
반투명의 아름다움을 실감하기 위해서는 햇살이 반투막인 나무 이파리를 새어나오는 광경을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5월에, 나무 이파리들이 신선한 신록일 때 해와 눈 사이에서 해의 빛을 걸르는 반투명 초록의 아름다움은 말로 다하기 어렵다. 같은 모양으로 가을에 단풍을 보면 이것 역시 보통 단풍이 아니다. 세상에 저렇게 타오르는 루비가 또 있던가.
반투명은 간단히 말해서 눈부신 아름다움이다. 반투명은 무심히 유희하는 빛과 빛깔이 합작해서 만들어내는 작품이다.
성당의 색유리(스테인드 글라스) 창문을 구름 낀 날 실내에서 보면 우중충할 뿐, 하나도 아름답지가 않다. 그런데 해가 나와 햇빛이 창문을 통과해서 실내에 들어오게 되면 색유리 창문은 홀연 어둠에 불이 켜진 듯 황홀한 광경으로 바뀐다.
반투명은 투명과 불투명의 한가운데서 이 두가지를 관계 맺게 해준다. 반투명에는 투명도 들어 있고, 불투명도 들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반투명이 투명과 불투명의 혼합물은 아니다. 반투명은 투명도 포용하고 불투명도 포용하는 동시에 반투명 자체의 독자적인 특성을 지닌다.
투명은 수정처럼 너무 맑아 시리다. 불투명은 콘크리트 벽처럼 막혀서 답답하다. 반투명은 시리지 않고 뿌우연 옥처럼 따뜻하다.
어떤 물체가 투명하다 하는 것은 빛이 그 물체를 완전히 통과하는 것을 뜻한다. 빛이 머물러있고 싶어도 쫓겨나다시피 하여 투명체 안에 머무를 수는 없다. 따라서 빛과 투명체의 관계가 성립될 여지가 없는 것이다.
불투명체는 처음부터 완전히 빛을 거부한다. 따라서 빛이 불투명체에서 튕겨져 나올 뿐 빛과 불투명체의 관계 역시 맺어질 수가 없다.
반투명은 빛의 일부 통과요 일부 머물러 있음이다. 빛의 입장에서 보면 반투명은 그야말로 자유다. 머물러 있고 싶으면 머무를 수 있고 나오고 싶으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반투명은 투명과 불투명이 희생적으로 한 발짝씩 물러나 있는 상태에서 성립된다. 반투명은 투명의 겸허요 불투명의 겸허다. 그리하여 반투명은 관계의 성전(聖殿)이다.
나는 시 「반투명」에서 반투명을 이 시의 핵심적인 구실을 맡는 ‘상징(象徵, symbol)’의 위상(位相)에 끌어올렸다. 곧 ‘반투명’을 예수그리스도의 상징으로 삼은 것이다.
그 부분의 시구는 다음과 같다. “내 나사렛 예수에게 / 목숨걸고 점점 더 / 매혹돼 들어가는 것도 / 투명과 불투명이 피 흘리며 교차하는/ 반투명이/ 바로 예수에서/ 오롯이 이루어진 때문인저.”
투명을 완전무결한 하느님으로 본다면 하느님의 피조물인 우리 인간은 그 무명(無明)과 유한성과 불완전성 때문에 불투명으로 보고,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서 신성(神性)도 인성(人性)도 두루 갖춤으로써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이어주는 예수를 ‘반투명’으로 본 것이다.
반투명의 사상(思想)에서 그 핵심적인 의의(意義)가 여기에 있다. 내가 시 「반투명」 을 특히 아끼는 까닭도 실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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