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에 나는 프랑스 파리에 있는 외방전교회에 머물며 안식년을 가졌다. 그 때 유럽 각지의 성당과 미술관, 박물관 등을 방문하여 인류의 귀중한 유산과 교회미술을 보고 배울 수 있었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은 단순히 과거의 유산을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하는 친교의 장처럼 보였다. 이 세상에는 우리보다 앞서 수많은 사람들이 살았다. 이처럼 우리의 삶은 선조들의 삶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고, 앞으로 우리 후손들의 삶과도 이어질 것이다. 특히 박물관은 우리 보다 앞서 살았던 사람들을 위해 마련한 추억과 만남의 공간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 때 방문했던 수많은 미술관과 박물관도 인상적이어지만 지금도 가장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은 일년 동안 머물렀던 파리외방전교회이다.
외방전교회는 박해시대부터 우리나라에 선교 사제를 파견하였고, 선교사들은 생명을 바치면서까지 복음을 전하였다. 그들 가운데 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 등 10위가 103위 성인에 포함되어 있다. 이같은 선교사들의 고귀한 희생들 통하여 오늘날 한국교회는 이처럼 성장할 수 있었다. 현재 그곳에는 100여명의 사제들이 함께 살고 있다. 파리 외방전교회 회원으로서 본부에서 근무하는 신부님들은 대부분 아시아의 여러 지역에서 오랫동안 선교를 하셨던 분들이다. 또한 우리나라를 포함한 아시아 각국의 유학 사제들이 머물며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고 있다.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에는 선교사나 선교지역과 관련된 유물들과 자료실 등이 있다. 그곳의 선교사들은 자신들보다 앞서 살았던 선배 선교사들을 기억하기 위한 공간들을 많이 만들어 놓았다.
박해시기에 선교사들이 본부로 보냈던 귀중한 편지들과 자료들, 고문서들, 도서관, 순교자 기념관, 박물관 등을 갖추어 놓았다. 특히 순교자 기념관은 본관 1층의 식당 옆에 있어서 자연스럽게 상주하는 사제들이나 방문자드이 드나들며 순교자들을 기억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 안에는 한국관도 마련되어 있어서 성 김대건 신부님의 친필 편지부터 200주년 신앙대회까지의 유물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순교자 기념관에는 외국신자들이 자국의 언어로 설명을 들을 수 있도록 한국어, 일어, 중국어, 영어, 불어로 된 안내 방송서비스까지 해놓았다.
그 외에도 순교자 기념관이 있는 복도 벽에는 200여년 전의 평양 시내를 담은 커다란 그림도 걸려 있어서 그 앞을 지나갈 때면 항상 마음이 설레곤 하였다. 또한 성당과 건물의 여러 벽에는 선교사들이 외방으로 파견되는 성화, 선교사들과 한국신자들을 담은 성화, 한국과 중국, 베트남에서 순교한 선교사들과 성인들을 한 화면에 담은 커다란 성화 등이 걸려있다 정원의 한쪽에 있는 성모 동산에도 외방에서 선교하다가 순교한 성인들의 이름을 대리석에 새겨놓았는데 그곳에는 우리나라에서 순교한 분들의 이름도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기숙사 가운데 순교성인들이 지냈던 방 입구에는 십자표시가 있고, 그 방에는 또 다른 선교사들이 살고 있다. 그 외에도 외방전교회에 있는 선교사들과 관련된 유물들을 다 언급하자면 끝이 없다. 외방전교회 본부 전체가 살아있는 선교사 기념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현재의 선교사들만 만난 것이 아니라 과거에 생명을 바치면서까지 용맹하게 복음을 전했던 무수한 선교사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곳에 있는 신부님들은 책상과 침대가 겨우 들어갈 정도의 좁은 방에 살면서도 선배 선교사들을 기리기 위해서 그 많은 공간을 기꺼이 마련한 것이다.
우리 한국교회는 200여년의 역사 가운데서 100여년간 혹독한 박해를 받았고, 이 때문에 1만여명이 넘는 순교자들이 탄생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 그 많은 신앙선조들을 기리는 공간은 절두산 순교박물관을 비롯하여 불과 몇 곳밖에 되지 않는다.
지난 1984년에 103위 시성식을 거행했고, 올해에 신유박해 순교 200주년을 기리고 있지만 순교자들의 행적을 더듬어 보기란 여전히 힘들다. 순교자들을 기리는 공간뿐 아니라 박해 이후에 100년 동안 만들어진 교회 미술이나 성물들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제대로 된 미술관이나 박물관 하나도 갖지 못하였다. 다가오는 21세기는 문화의 세기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교회의 문화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우리것을 먼저 소중히 여기는 의식이 있어야 할 것이다. 교회문화를 아끼고 사랑하는 일은 신앙선조들을 공경하는 일이며 동시에 우리의 후손들에게는 더없이 귀중한 선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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