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나의 동포 K형. 형이 선천성 피부병으로 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는 소식을 요새 들었습니다. 그 피부병이 어떤 종류의 질환인지 의학 상식이 전연 없다시피 한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만, 형이 겪는 고통이 밤낮없이 밀려오는 심한 가려움증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나도 전에 두드러기로 인한 심한 가려움증에 상당 기간 괴롭힘을 당한 적이 있어 가려움의 성질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짐작이 갑니다. 그 바람에 가려움과 관계되는 시가 두 편 나왔죠. 곧 「긁는다는 것」과 「가려움과 음악」입니다. 이 중 「긁는다는 것」을 들추어보니 다음과 같은 구절이 눈에 띕니다.
‘욥은 긁었다./ 긁지 않으려 해도 손이 저절로 갔다./ 온 몸이 피투성이인데도/ 나중엔 사금파리로 마구 긁었다.’
욥은 물론 구약에 나오는 욥입니다. 가혹한 얘기지만 (실천이 어렵기 때문에) 가려움에 대처하는 최선의 방법은 아무리 가려워도 긁지 않고 내버려두는 것이겠죠. 그러면 극성을 떨다, 떨다 지쳐서 가려움이 슬그머니 도망쳐버릴 때가 옵니다. 하지만 이러기 위해서는 거의 초인적인 의지력과 노력이 필요하겠지요.
K형. 저는 평생 가르치는 직업에 종사해왔기 때문인지 무슨 말을 해도 그것이 어느 틈엔가 설교조로 흐르기 일쑤입니다. 앞으로 형이 좀 듣기 거북한 말이 나올지도 모르지만 너그럽게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남이 고통에 빠져 있을 때 그 고통을 직접 나눌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숙명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홀로서 가셨듯이. 그러나 그 고통을 직접 나눌 수는 없다손 치더라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따뜻한 말로 고통 받는 이에게 위로와 용기와 희망을 줄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나눌 수 있는 일의 전부가 아닐까요.
형이 고통 중에 있다는 생각을 이렇게 저렇게 되새기고 있는 중에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의 핵심은 다음과 같은 구절입니다. ‘달도 차면 기우나니.’ 「용비어천가」인가 어딘가에 나오는 구절인데, 참으로 진리를 담은 묘구다 싶습니다.
제행(諸行)이 무상(無常)함을 이 이상 더 잘 표현할 수는 없겠지요. 보름달은 밝음의 극점에 와 있지만 이 순간을 지나고 나면 앞으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어둠과 쇠퇴뿐입니다. 반면 초승달의 경우는 빛이 졸아 들을 대로 졸아들은 지금 앞으로 올 것은 밝음과 충만과 희망 밖에는 없습니다. 지금을 넘어서는 순간 좋은 일 기쁜 일 등 긍정적인 일만이 전개되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고 그 고비가 있습니다. 그 고비를 넘으면 사태(事態)의 방향은 반전(反轉)하며 지금까지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기쁨은 슬픔으로, 슬픔은 기쁨으로 돌고 돕니다. 그러니 기쁠 때 기쁘다고 너무 우쭐할 것도 없고, 슬플 때 슬프다고 너무 낙심하지 않는 것이 인생살이의 요령이겠는데, K형도 이런 정도는 이미 실감하고 있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그런데 K형, 당신께 하고 싶은 얘기가 하나 더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고통이 심하면 심할수록, 어려움이 가혹하면 가혹할수록 그것에 비례해서 위안과 즐거움도 그만큼 커진다는 역설적인 사실 말입니다. 이것은 얼마 전에 내가 허벅지의 근육통으로 심한 고통을 겪었을 때 다시 한 번 실감한 일인데, 아픔이 심하면 심할수록 오히려 더 희망이 생기더라는 말입니다. ‘…그래 극성떨어라. 그래봐야 너는 점점 더 너의 고비에 가까워지고 있어. 그 순간만 지나면 너는 물러가게 돼 있는 거야!’ 무슨 일이고 극성 떠는 일이 심하면 이제 그 일이 고비에 와 있다는 증거 아니겠어요? 그리고 여기에 우리의 즐거움이 숨어있습니다.
K형, 우리는 인생 안에서 삶의 짐을 애써 견디는 일을 피해서는 안 되지만, 동시에 우리 삶을 다소의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자세도 필요할 것으로 느껴집니다. 당신이 요즈음의 어려움을 잘 참아받을 수 있게 해줍시사고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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