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1년 세계적으로 저명한 두 학자가 인간의 최대수명을 놓고 내기를 했다. 미국 아이다 대학의 오스태드 교수는 인간이 150세 이상 살 수 있다고 주장했고, 일리노이 대학의 올샨스키 교수는 최대로 잡아도 130세를 넘지는 못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내기 시점에서 149년 후인 2150년 1월1일을 기준으로 150세까지 생존한 사람이 나타난다면 오스태드가 이기는 것이고, 반대의 경우는 올샨스키가 그때까지 적립된 기금을 모두 가져가게 된다. 이들은 150달러씩을 신탁예금하고 매년 일정액을 추가납입해서 2150년까지 상금 5억 달러를 만들어 이기는 쪽 자손에게 주기로 하고 학계의 공증까지 받았다.
이 두 학자가 예상하는 인간 수명의 최대치는 130~150세이다. 지금껏 학계가 주장해온 인간의 한계수명 120세는 인간의 성장이 통상 20세까지이고 지구상에 존재하는 동물 대부분이 성장기간의 6배 이상 살지 못한다는 가설을 근거로 계산된 것이었다. 하지만 DNA복제기술과 항노화물질 개발 등 의학의 발달 추세로 봐서는 그 한계를 정하기 어렵다는 게 오스태드 교수 등의 주장이다.
지금 우리의 평균수명은 이미 80세에 육박했고, 100세 이상 장수노인이 전국적으로 2천 명에 달한다. 두 학자의 내기에 견주어 봐도 앞으로 100세 언저리까지 사는 건 별 무리가 없지 싶고, 지금 청년층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겐 100세가 평균수명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문제는 무턱대고 오래 살기만 하면 축복이냐 하는 점이다. 100세 장수는 분명 축복이지만 지불해야 할 대가가 있고, 준비되지 않은 장수는 고통이 따르게 되어 재앙으로 인식된다는 점이다.
초고령사회가 바로 눈앞에 와있다. 2030년엔 65세 이상 노인이 인구 4명당 1명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품위 있고 우아하게만 늙어간다면 노년기가 너무 길게 느껴지지도 않을 것이며, 빈곤과 질병, 소외와 외로움만 없다면 왜 오래 사는 게 축복이지 않겠는가. 다만 장수는 비용 부담을 수반하므로 충분한 노후대비 없이는 질 높은 노후생활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자칫 돈 있는 사람은 오래 살고 돈 없는 사람은 일찍 죽는 그런 세상이 오게 생겼다. 따라서 100세 시대를 축복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개인의 재무설계와 국가의 보편적 공공복지노력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기 때문에 우선 건강해야 하는데 육체적 건강 못지않게 정신적 영적 건강도 매우 중요하다 하겠다.
또한 궁극적으로는 양보다 질, 오래 살기보다 곱게 늙는 것에 더 큰 관심이 쏠려있어, 자신의 장점을 살릴 문화생활과 여가생활을 즐기면서 우아하게 늙는 것이 최상이라는 인식이다. 서구인들은 은퇴라는 단어에서 응답자의 2/3가 ‘자유’와 ‘행복’을 떠올리는데 반해, 그렇게 답한 한국인은 1/3에 불과하다. ‘은퇴’라는 단어에서 퍼뜩 재정적 어려움이 떠오르고 두려움과 외로움이 엄습한다고 한다. 지금도 55세에 은퇴하면 30년, 65세에 은퇴해도 20년은 더 살아야 하니 은퇴 후의 삶이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다.
질 높은 노후생활을 위해서는 돈과 건강뿐 아니라 일과 여유, 그리고 정신적이고 지적인 성숙함이 따라줘야 한다. 사람은 평생을 살면서 세 가지 여유로움이 있어야 한다. 하루는 저녁이 여유로워야 하고, 일 년은 겨울이 여유로워야 하며 일생은 노년이 여유로워야 한다. 새로운 개념의 노년 시테크가 필요한 것이다. 노인들의 여가활동이 중요한 문화 키워드로 대두된 만큼 노년의 여가에 대한 사회적 지원과 관심이 절실하다. 그만큼 문화와 종교 활동의 역할도 커졌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가톨릭교회도 노인문제에 대해 적절하고도 효과적인 대응을 구체적으로 취할 시기가 온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노인 문제에 가장 효율적으로 대처하면서 그들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도움을 주고 사랑할 수 있는 곳은 교회뿐일지도 모른다. 노인들이 겪는 문제는 크게 건강, 경제, 사회참여, 고독의 문제로 압축할 수 있다. 교회는 이 네 가지 영역의 복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특히 교회가 노인들을 도울 수 있는 영역은 영적인 건강으로 고독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다.
불안해하고 쓸쓸해하는 노인들을 하느님께 인도하여 주님의 평안 가운데 쉼을 얻게 하고 영적 성장을 돕는 일은 시대적 요청인 동시에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기도 하다. 한편 국가 차원에서 늘어가는 노인의 복지수요를 교회로 하여금 감당하게 하고 그 지원책을 강구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겠다. 주님께선 섬김의 대상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셨는데, ‘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의 목록에 더하여 외로운 노인이 추가되어야 할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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