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계절 가을에 문득 떠올린 생각이라기보다는 평소에도 마음을 스치는 생각이었다. 독서에도 단수가 있다면 나는 몇 단이나 될까?
능력과 경지(境地)의 등급을 매기는 경우 동양에서는 품(品)자를 쓰기도 한다. 능품(能品), 일품(一品), 신품(神品) 따위가 그 보기다. 이 중 ‘신품’이 품목의 최상급임은 말할 것도 없다.
1에서 9까지의 숫자를 단(段) 자와 결합시켜 더욱 세밀하게 능력의 등급을 가른 것은 아마 일본 사람이 처음 시작한 일이 아닌가 싶다. 바둑과 장기(일본 장기)를 두는 솜씨에 따라 단위(段位)를 주며, 단위에 따라 사람의 전문가로서의 신분도 그만큼 상승하게 된다. 다분히 봉건적인 시대의 산물이지만, 이러한 관습에 편리한 면도 있어 아직도 일반적으로 단위의 개념이 통용되고 있다.
초단 (1단)부터 9단까지에는 또 각각 설명풍의 별명이 붙어 있다. 내가 다 외우지는 못하지만 초단은 수졸(守拙, 서투르나마 지켜낸다)이고, 5단은 약우(若愚. 어리석음과 같다)이고 8단이 좌조(坐照, 앉아서 밝게 내다본다)이고, 9단이 입신(入神, 신의 경지)이다. 이러한 단위 개념은 바둑 아닌 딴 분야에서도 비유적으로 쓰인다. 예컨대 우리나라 정치사에서 이른바 ‘3김’은 정치 9단의 별칭을 누리고 있다.
단위 개념이 봉건시대의 유물임은 요즈음의 기사(棋士, 바둑을 업으로 삼는 사람)의 승패의 현황에서 잘 드러난다. 초단이 심심치 않게 9단을 꺾는 것이다. 이런 점만 보더라도 바둑은 역시 스포츠의 성격이 강하다.
그건 그렇고 나는 스스로 독서 단수 몇 단 쯤으로 자평(自評)하고 있는가? 이실직고하여 고단자 되기는 벌써 틀렸고, 2,3단 정도, 기껏해야 4, 5단을 넘지 못할 것이다.
도대체 독서능력의 기준을 어디에 두고 이런 허황된 소리를 늘어놓는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독서를 매우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리하여 ‘책벌레’소리를 더러 듣는다면, 독서 초단 면장을 딸 수는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차츰 올라가서 괴테, 앙드레 지드, 헤르만 헤세 쯤 되면 물론 9단이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봐서 이 사람들이야말로 엄청난 독서가들이다. 읽은 책의 수량은 몇 ‘만(萬)’단위 일 것이다.
독서의 고단자가 되려면 말할 것도 없이 읽은 책의 분량이 많아야 한다. 책을 읽는 속도도 어느 정도는 빨라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정독(精讀)하는 능력이다. 고금의 양서라고 평가받는 책이라면, 고전 중의 고전 반열에 오를 책이라면 그런 책이 품고 있는 정신적 가치의 내용과 양(量)은 그야말로 심해와도 같아서 퍼내도 처내도 끝이 없다. 퍼내는 사람의 능력만큼 퍼내게 된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독서의 고단자냐, 아니냐가 판가름난다.
독서 고단자는 이를테면 8천 미터 급 이상의 산을 오르내릴 수 있는 등산가에 비길 수 있다. 굉장한 단련과 수련 없이 그것이 가능할 리가 없다.
대학 쯤 졸업하면 독서하는 방법을 대충 익힌 것으로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나서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쌓아올려야 하는 것이 독서다. 책 읽기란 그만큼 멀고 높고 깊은 길이다.
요즈음 ‘문화’란 말이 대유행이다. 기부문화, 화장실 문화, 응원문화 등등 다 ‘문화’자가 붙는다. 그러나 문화의 중심(中心) 하고도 그 핵심에 책읽기, 독서가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상대방의 독서 능력을 평가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재산 목록 내용을 전부 알게 되는 경우처럼 조심스러운 일이다. 책에 관해서 얘기를 나눠보면 그것이 어느 정도 드러나게 된다. 신구약 성경은 특히 「신약성경」은 독서의 수준을 가늠하는 좋은 기준이 된다. ‘신약성경은 별 재미가 없더라’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독서의 수련을 한참 더 쌓아야한다.
책읽기는 그때그때 필요한 정보를 얻는다는 차원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책 읽기는 언제나 교양의 함양(涵養)과 관련시켜야할 것이다.
나에 독서과의 핵심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좋은 책을 정독하여 깊은 감명을 받게되면 반드시 사람이 달라진다…. 이렇게 해서 인생은 하향곡선이 아닌 상승곡선을 더듬어나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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