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연재하고 있는 나의 글 중 23번, 그러니까 10월 16일자 신문에 난 글의 제목은 ‘난득호도(難得糊塗)’ 였었고, 나는 막스 피카드의 저서 『침묵의 세계』에서 한 구절 인용하는 것으로써 끝을 맺었었다.
그런데 그 인용문의 끝은 또 이렇다. ‘침묵은 독자적인 현상이다…’
‘독자적인 현상’이란 또 무엇인가? 침묵은 단순히 소리 없는 상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소리가 없어 고요한 상태도 침묵이긴 하겠지만, 침묵은 그 이상의 것이다.
침묵은 마치 깊고 넓은 바다처럼 ‘세계’라는 말과도 능히 결합될 수가 있다. 요새 ‘침묵의 세계’라는 말이 나의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그리하여 이 말이 조금씩 조금씩 그 본색을 더 드러낸다.
‘침묵’은 존재적 원리이다. ‘침묵’은 살아 있는 원리이다. 살아 있는 원리가 어떤 기능을 갖는 다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침묵은 살아있는 기능이다. 원리이자 기능인 침묵, 이것이 바로 ‘침묵의 세계’다. 동시에 이것은 또 ‘독자적인 현상’이 되기도 한다.
침묵의 세계는 그것이 원리이자 기능이기 때문에 공간과 시간 안에 존재할 필요가 없다. ‘원리’의 존재에 무슨 공간이 필요한가. 원리는 또한 진리의 한 가닥이기 때문에 시간을 초월해서 초시대적이다. 그리하여 침묵이란 힘 있고 아름다운 한 상념(想念)이다.
지난번에도 잠깐 언급했지만 이 ‘침묵’의 원리를 강조한 분이 한국복자수도회를 창설하신 무아(無我) 방유룡(方有龍) 안드레아 신부님(1900-1986)이시다.
방 신부님이 1986년 선종하셨을 때 영결미사에서 신부님의 친한 동창이신 임충신(林忠信) 마지오 신부님은 ‘한국 천주교회는 성인(聖人) 한 분을 떠나보냈다’고 분명히 말씀하셨고, 고 김수환 추기경님도 조사(弔辭)에서 방 신부님의 수덕(修德)을 각별히 칭송하시던 광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방 신부님이 수행(修行)하는 사람들에게 늘 강조하신 것은 ‘점성정신(點性精神)’이었는데, 이 점성정신이란 모든 일을 정성껏 알뜰하게 행하라는 가르침이었다. 그리하여 수도자는 침묵(沈 ), 대월(對越), 면형(麵形), 무아(無我)의 순서로 차츰 수도의 단계를 높여야 한다고 강조하셨고, 이러한 수행의 가장 기본인 바탕이 되는 것이 바로 ‘침묵’이다.
방 신부님이 강조하신 ‘침묵’의 원리는 총괄적인 극기(克己)를 뜻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그리하여 이 침묵을 내외침묵(內外沈 )과 영혼침묵(靈魂沈 )의 두 범주로 나누고 다시 ‘내외침묵’을 동작침묵(動作沈 ), 오관침묵(五官沈 ), 그리고 ‘영혼침묵’을 사욕침묵(邪慾沈 ), 이성침묵(理性沈 ), 의지침묵(意志沈 )으로 나누니, 수행의 처음부터 얼마나 ‘침묵’의 원리를 강조하셨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나는 방 신부님이 직접 ‘한 2,3년 열심히 노력하면, 대개의 사욕에서는 벗어날 수 있어요.’ 하고 말씀하신 일을 지금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수사나 수녀의 경우처럼 오로지 수도만을 생각하며 수행하는 수도 전문가들을 두고 하는 말이며 나 같이 속(俗)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은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지향(指向)이다. 나의 경우에는 너무 지나치게 행동하는 것을 삼간다는 범위 내에서 이 말을 생각하고 있다. 곧 과식, 과욕, 과로, 과도한 집착 따위를 피하자는 것이 당면의 목표인데, 이런 정도도 그리 쉬울 리가 없다.
나의 경우야 이렇지만, 막스 피카드의 『침묵의 세계』는 얼마나 깊고 아름답고 무궁무진한 세계란 말인가. 오늘도 피카드의 글을 인용하는 것으로 이글을 마무리할까 한다.
‘사랑 안에는 말보다 더 많은 침묵이 들어 있다. “말하지 마세요! 당신의 음성이 잘 들리도록!” ’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














.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