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9일~12월 1일부산에서 OECD/DAC(개발원조위원회) 주관 ‘세계 개발원조 총회’가 열립니다. 이 글은 이번 회의가 우리 교회와 신자들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소개하고, 이에 대한 우리의 사명을 일깨우고자 마련된 글입니다.
1. 지구상의 가난과 원조
우리는 원조(援助)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에는 많은 가난한 나라들이 있고, 그들 중 일부는 빈곤국(최빈국), 혹은 개발도상국으로 분류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쉽게 말해 그들을 돕는 것, 특히 대개는 경제적 수단으로 그 나라들을 도와주는 것을 ‘원조’라 합니다. 원조의 대부분은 정부의 기금이나 혹은 우리들도 많이 하고 있는 개인적 기부들이 모여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원조는 왜 하는 걸까요?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기압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바람이 불듯, 그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곳에서 그렇지 못한 곳으로 흘러가는 것이 원조일까요?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원조의 이유’를 말하고자 할 때 쉽게 생각하는 것이 한국전쟁 이후의 가난했던 모습입니다.
“우리나라는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고, 그렇지만 세계 선진국의 원조를 받아 그것을 마중물 삼아 국민들의 피땀 어린 노력으로 가난을 극복했다. 어느덧 우리나라는 세계 선진국들의 모임이라 하는 OECD 회원국이 되었고, 원조를 베푸는 나라(공여국)들의 모임이라 할 수 있는 OECD 내 ‘개발원조위원회(DAC, Development Assistance Committee)’의 24개 회원국 중 하나로 2009년 당당히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세계 가난한 나라들의 모범이며, 이제 우리는 우리나라의 가난 극복의 역사를 바탕으로 세계 가난한 나라들을 도와야 한다.”
이상이 특히 우리나라 정부를 중심으로 많은 원조기관들이 원조의 이유, 혹은 근거로 많이 말하는 대답입니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지금이라도 누군가를 도와야 할 것만 같습니다.
2. 원조의 복음적 이유
하지만 이러한 이유로는 원조의 이유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교회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위에서 말한 것에는 이른바 ‘받은 것이 있으니 주어야 한다’는 경제논리가 숨어 있습니다. 단지 이러한 논리들은 가난하지 않았던 많은 (선진)공여국들의 오랜 원조를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미국이나 대부분 서유럽 국가들은 원조를 받은 일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오랜 시간 동안 가난한 나라들을 지원해 왔습니다. 받은 일이 없는데 어떻게 줄 수 있을까요? 그저 단순한 경제논리로는 이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원조의 논리를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당신의 모상대로(창세 1,26) 만드셨습니다. 여기에 바로 인간 생명의 존엄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태초의 평등한 모습을 잃어버리고, 이 세상에는 ‘가난’의 모습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할 때, 인간의 천부적 존엄성은 위협 받게 됩니다.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없어 쉽게 병에 걸리는 아프리카 많은 나라들의 사람들은 평균 수명이 30대입니다. 그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만한 최소한의 음식도 없어 굶어 죽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는 것은 이미 방송이나 언론을 통해 잘 아실 것입니다. 지독한 가난 앞에서 인간 스스로의 존엄성을 지키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가난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당신의 모상을, 우리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구조적 악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 교회가 찾을 수 있는 원조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의 존엄성을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굶주리는 민족들이 오늘 부유한 민족들을 향하여 처절히 호소한다. 교회는 이 처절한 부르짖음을 귀담아 듣고 함께 괴로워하며 모든 사람들을 불러, 도움을 청하는 이 형제들에게 따뜻한 사랑의 손길을 펴도록 요청하는 바이다.”(교황 바오로 6세, ‘민족들의 발전’ 3항)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나 바리사이가 아니라 죄인들, 창녀, 세리, 병자들과 즐겨 어울리시고 함께 식사도 하셨습니다. 당시에 그 사람들은 ‘정상적’ 공동체에 함께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그들을 ‘하느님 나라의 식탁’이라는 가장 완전한 공동체에 받아 주십니다. 그들이 잃어 버렸던 하느님의 모상을, 인간 존엄성을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며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서 알려주신 바를 따라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존엄성이 다시 살아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은 이 땅에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선취할 수 있도록 하는 하나의 ‘성사적 행위’인 것입니다. 원조는 이미 하나의 성사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세상과 다르게 ‘원조’에 임해야 하는 태도입니다.
3. 원조를 넘어선 개발, 그리고 부산 세계 개발원조 총회와 교회의 사명
개발 혹은 발전은 우리나라에서 때로 부정적 의미가 담긴 말로 많이 인식되어 왔지만 이 맥락에서의 개발은 좀 더 통합적 의미입니다. 바오로 6세 교황님은 같은 회칙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발전은 경제적 성장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발전이 올바른 것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 전체와 인류 전체의 발전 향상이 전체적인 것이라야 한다(‘민족들의 발전’ 14항).”
많은 선진공여국들이 경제적 도움 수준의 ‘원조’의 효과에 대해 논의해 온 것에 비해 교회기구를 포함한 지구촌의 많은 시민사회단체들(CSO 혹은 NGO)은 원조를 통해 개도국 사람들의 실제 ‘삶의 질’이 변화되기를 포함하는 ‘개발’의 효과에 대해 이야기 해왔습니다. 이번 달 말, 전 세계에서 오는 2000명의 참가자들과 함께 부산에서 있게 될 ‘세계 개발원조 총회’는 바로 이러한 흐름에서 ‘원조’를 넘어 ‘개발’을 이야기하게 될 중요한 의미를 가진 회의입니다. 그것은 교회가 태초부터 바라오던 인간존엄성, 하느님 모상의 회복과 함께 하느님 나라의 선취와도 같은 선상에 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많은 나라들의 카리타스(Caritas)를 중심으로 한 교회 개발원조기관들도 이 회의에 시민사회단체의 일원으로 함께할 것입니다. 그것은 이 회의가 단지 경제적 논리의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빛 안에서, 진정한 이웃사랑의 정신으로 발전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일 것입니다. 이 글을 빌려 신자 여러분들께 부산 세계 개발원조 총회를 소개하는 것은 이 회의가 단지 관련된 사람들의 말잔치로 끝날 것이 아니라 특히 우리 교회가 더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라는 점을 말씀드리기 위함입니다.
첫째,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을 돕는 일은 바로 우리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이 더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갚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총과 사랑을 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웃사랑의 의무인 것입니다. 둘째, 우리의 도움이 그저 물질적 전달(원조)에서 끝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본래부터 부여받았던 존엄성이 회복될 수 있도록(개발) 관심을 갖는 것 또한 우리 교회의 의무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번 회의가 그저 하나의 국가적 잔치로 끝날 것이 아니라 우리 교회와 신자들 모두에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책임을 다시 한 번 일깨울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또한 인간 존엄성이 결코 침해당하지 않도록 온갖 장애물을 제거하고 도의와 덕행을 도와주고 북돋아주는 모든 것을 증진시키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교황 요한 23세, ‘어머니요 스승’, 179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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