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날,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미사에 가려고 길에 나선다. 여섯 시 반 미사는 너무 이르고, 열한시 미사는 사람들이 너무 북적거린다 싶어 나는 아홉시 미사에 가는 경우가 요사이 많아졌다. 빈 택시가 오지 않는다.
길 건너에서 이 광경을 본 택시 한 대가 조금 가서 유턴을 하고 정확하게 내 앞에 차를 딱 세운다. ‘어서 오십시오’ 택시기사가 하는 말과 내가 ‘고맙습니다’ 하는 말이 거의 동시였다.
세상에는 불친절한 기사도 있다. 택시를 타고 ‘oo까지 가주세요’ 하고 내가 말을 해도 들었는지 못들었는지 말이 없다. ‘연대 북문으로 들어가서 금화터널로 가주세요.’ 역시 돌아오는 것은 침묵뿐이다. 이런 택시일수록 자기가 좋아하는 대중가요를 크게 틀어 놓거나, 아니면 휴대전화로 낄낄거리며 길게 통화를 한다. 제멋대로인 기사의 손님 접대에 비하면 방금 내가 탄 택시 기사는 그야말로 천사다. 나는 3천원을 건네며 ‘됐습니다. 고맙습니다’ 하고 내린다.
나는 불친절한 택시 기사한테서도 보통 천원 이내의 거스름돈은 받지 않는다. 이런 정도가 사회에 대한 나의 보은이다 싶어 대개 지킨다.
기본요금 2천 4백원은 법에 의해 정해진 최소한의 금액이다. 기사의 친절에 대해 보답하는 마음으로 내가 기본요금에 돈을 얼마 더 얹어서 내고 말고는 나의 자유에 속하는 문제다. 내가 더 많은 돈을 택시 기사에게 주고 싶어도 그렇게 많은 돈도 없거니와, 이런 정도의 일에 관한 판단은 내가 지닌 양식(良識)의 범위 내에서 내가 하면 그만이다.
우리나라는 경제 성장과 수출 실적에서 세계 10위 권에 진입하려 하고 있다고 모두 대견해한다. 반가운 일이다. 이만하면 경제면에서는 세계의 선진국의 대열에 합류한 셈이다. 하지만, 정신생활 면에서 공중도덕과 관련되는 문화 면에서는 선진국의 대열에 끼기에는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물질적 성과는 비교적 단시일 내에 이룩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정신적인 시계에서는 결코 단시일에 수준이 오르는 것을 바랄 수 없다. 오랜 의지와 인내로 조금씩 조금씩 쌓아올려야 한다.
작은 친절도 만나기가 그리 쉽지 않다. 길 하나 물어봐도 우선 나를 위아래로 훑어본 다음 퉁명스레 ‘저어기요 저기.’ 물론 사람마다 다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다.
사람의 마음은 이상스러울 정도로 전염성이 있다. 전염성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지 아니면 모방성(模倣性)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지 모르겠으나, 하여간 우리의 기분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그리고 신속하게 서로 닮고 전파되는 것이다.
택시 기사가 친절하기 때문에 전염되어 나도 최대한의 호의로 대했다. 나의 호의가 기분 좋아 그 기사는 다음 손님한테 더욱 친절히 대했을 것이고, 그 손님은 또 기분이 좋아져서 집에 돌아가 더욱 착한 아버지 어머니가 됐을 것이고, 기분 좋은 부모에게 전염되어 어린이들도 더욱 착하게 공부도 열심히 했을 것이고, 그 어린이의 담임선생님도 이런 아이들을 대견해 하며 더욱 열심히 가르치는 선생님이 됐을 것이고, 교장 선생님도 부하 직원이 유능한 교사로 변하는 것이 감격스러워 더욱 관대하고 훌륭한 교장 선생님이 될 것이고, 이렇게 기쁨의 파동은 사회 전체에 퍼져나가게 될 것이고, 마침내는 나라 전체가 밝고 바른 지상낙원이 되리라는 가능성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행복한 사회, 천국과도 같은 지상 낙원은 결코 정치, 경제 등의 제도적 개혁만으로는 실현될 수가 없다. 사회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마음 안에서 그러한 자각과 염원과 신념이 싹터야 한다.
이러한 상상을 결코 헛된 공상이라고 비웃지 말 일이다. 작은 친절의 기폭제를 우리 모두는 언제나 어디서나 자발적으로 터뜨려야 한다. 꾸준히 지속하면 언젠가는 변화의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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