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미국의 경제학자 머슬로우는 ‘욕구 5단계설’이란 이론을 내놓았다. 그는 인간의 행동을 욕구의 만족화 행동으로 보고, 욕구는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점차 나아간다고 하였다. 개인의 행동은 그 무렵의 가장 절실한 현안 욕구에 의해 결정된다.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첫 번째 욕구는 ‘생리적 욕구’이다. 이는 성욕을 포함한 의식주에 대한 욕구이며 인간의 생명을 유지해 가기 위한 기본적 욕구이다. 인간이 밥만으로 사는 것은 아니지만 정말로 굶주리는 사람에게는 밥이 전부일 수 있다.
그 다음에는 ‘안전(혹은 안정) 욕구’이다. 배가 고플 때는 부끄러움을 느끼거나 남의 말에 귀 기울일 틈도 없이 먹을 것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먹을 것만 찾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충족되고 나면 그때 비로소 자신의 안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욕구가 충족되면 그 다음으로 ‘사회적 욕구’가 나타난다. 이것은 어떤 형태로든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존재하고자 하는 욕구이다. 사회 귀속 욕구라고도 할 수 있는데, 소속감과 대상을 필요로 하는 사랑에 대한 욕구이다. 배고픔도 해결하고 안전도 보장받고 사회의 일원이 되어 집단에 소속되었다고 해서 만족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앞의 세 욕구가 충족된 다음에는 네 번째로 남에게 인정을 받으려는 ‘인정(혹은 자존) 욕구’가 등장한다.
자존심을 지키고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요구가 여기에 해당된다. 자기가 남보다 뛰어나다는 우월감, 자신의 능력에 대한 확신, 뛰어난 업무 실적 등 바로 이런 요소를 통해 자존심을 만족시키고 동시에 그런 자신을 타인에게 인정받고자 한다. 지위와 명성 권력을 좇고 좋은 평판에 신경 쓰는 것도 다 이러한 욕구 때문이고 상을 받고 싶어 하거나 남을 지배하고 하는 욕구도 다 여기에 해당한다.
이 정도의 욕구만 채워진다 해도 상당한 수준의 인간이라 할 수 있고 우리는 흔히 성공한 사람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인간은 여기서도 만족하지 못한다. 다섯 번째 욕구인 ‘자기실현(혹은 자아실현) 욕구’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네 번째 욕구를 달성한 사람은 그 다음으로 최고의 존재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갖게 되는데, 사실상 자아실현이란 신의 영역에 가닿은 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단계이다.
무엇보다 자아실현의 욕구란 이처럼 반드시 머슬로우가 주장한 욕구단계를 하나하나 밟아서 도달하는 영역은 아닌 것이다. 그 역시 이 단계가 언제나 보편적 이론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이러한 단계를 대체로 타당한 전형적 패턴이라고 보았으나 동시에 많은 예외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예를 들면, 간디의 경우 앞의 4단계의 어느 욕구도 제대로 충족시킨 적이 없었다. 그는 이 모든 욕구를 건너뛰고 자기실현에 도달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위인이나 영웅은 그리 흔치 않다.
많은 유명 인사들이 죽음 직전에 ‘과연 내가 세상에서 한 것이 무언가’하는 회한 섞인 토로를 한다고 들었다. 자아 발견을 위해서는 자신에 대한 성찰과 반성, 인간과 사회 그리고 자연과 문화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선행되는 가운데 이상실현과 인격완성이 이뤄져야 하는데 그게 여의치 않은 것이다. 4단계 욕구까지 채워지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장하기를 멈추고 쾌락에 탐닉하거나 자존 욕구를 강화시키려는 경향이 짙다.
자아실현은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지만 종교가 인간의 진정한 자아실현을 돕고 더 나아가 초월욕구까지 이끌어 준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되겠다. 진정한 자아실현은 주님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실로 지난한 길이다. 바른 길을 가되 내가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곳이 진리의 땅임을 잊지 말고 나의 이상이 현실의 땅에서 실현되도록 수행해 나가야겠다. 그리고 자아실현은 염결한 자기만족이지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함이 아니다. 다른 이를 의식한 욕구가 아니라는 점에서 그것은 종교적인 자기성찰과 맥을 같이 한다고 하겠다.
요셉은 청소년 시절에 형들에 의해 다른 나라의 노예로 팔려갔다. 형들은 그를 죽이려 했고 그는 노예로 살다가 억울한 감옥살이도 했다. 그러나 모든 욕구가 억압된 가운데서도 요셉은 오히려 성숙과 통합을 이룬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결국 이집트의 재상이 되며, 나중에는 그의 형들이 기근의 위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적극 돕기까지 했다. 만일 요셉이 안전 욕구나 존경의 욕구 등의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면, 자신의 안전과 자존심을 처참하게 짓밟은 형들을 평생 저주하며 살았을 것이다. 재상이 되었다면 그 권력의 힘으로 복수를 했을 수도 있겠다. 요셉이 그렇게 초월적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느님을 믿고 사랑했다는 데 있었고 그것이 바로 자아실현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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