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키우고있는 개 「방울이」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가 길거리에서 놀고 있던, 학교에 채 입학하지도 않았을 사내아이 둘을 만났다. 자신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그 중에서 형으로 보이는 아이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보여주며 그 장난감에 대해서 나에게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방울이를 발견하고는 내가 키우는 개냐고 묵는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다짜고짜 『이 개 몇 천원 하는데요?』라고 묻는다. 자신이 키우는 개는 돈으로 계산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시키려고 시도하다가 결국에는 오래되어서 얼마를 주고 샀는지 잊어버렸냐는 아이의 질문에 긍정함으로써 얼버무렸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천진난만하게 자신의 조그마한 장난감을 자랑삼아 설명해주던 아이의 판단 기준도 역시 돈일 수밖에 없는가 하는 생각에 조금은 씁쓰레한 기분이 남았다. 하기야 지금은 월드컵이라고 불리는 축구대회 때문에 다소 조용해진 듯 하지만-물론 언론매체에서 조용하게 있다는 것이 곧 문제가 해결된 것을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얼마 전까지도 온 나라를 들쑤셔 놓았던 수많았던 「게이트」하며 카드빚을 갚기 위해 몇 만원 때문에 사람을 살해한 일을 보면 많은 이들의 가치관에는 돈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고, 그렇다 보니 어린아이에게도 역시 자신이 가지지 않은 어떤 것의 가치를 인식하는 매우 쉬운 방법은 돈으로 환산하는 것일 수 있다.
언제였는지, 그리고 누구였었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원래 돈이란 돌고 도는 것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떤 기억이 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돌아야 할 돈은 돌지 않고 거의 대부분 자신의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는 반면, 중심을 잡고 확실하게 서있어야 할 사람들이 돈 주변에서 쉴새없이 돌고 있고, 그러다 보니 결국에는 어지럼증을 느껴 정신까지 이상하게 된, 돈 사람이 너무나도 많이 나타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은 우선 오늘날 세계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소비주의의 결과로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소비주의는 새로운 제품은 항상 구입하여야 한다는 거의 병적인 강박감에 사로잡힌 현상이며, 유행의 측면으로는 거의 균일한 생활수준으로 나타나는데, 이러한 소비주의로 유혹하는 것은 바로 소비에로의 강박이다. 소비에로의 강박은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성공적인 실행 능력, 후회 없는 향락, 편리, 사치와 부유함 등과 같은 전적으로 양적인 가치들을 사회의 판단표지로 만든다. 그리하여 소비할 능력을 갖추어 성공적이고 행복한 삶을 보증 받기 위해 많이 벌어들여 만힝 소유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우리를 공공연하게 지배하도록 한다.
사람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소유하고 소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만약 누군가가 필요 이상으로 소유하고 소비한다면 그것으로써 그는 이웃과의 관계의 목적을 단지 이익의 정도에 따라 형성하고 이웃을 지배하고 착취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 스스로를 물질적인 유용함이라는 기준에 따라 인식하고 판단하여 인간 생명의 존엄성과 이웃과의 조화로운 관계를 부정하는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들의 사고를 교정하는 것이다 : 삶의 행복을 위하여 중요한 것은 물질을 더 많이 소유하고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상호간의 인격적인 관계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의 소비사회에서는 금욕의 훈련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절실하게 요구되어 진다. 금욕은 상품을 최대한 판매하기 위하여 시각적이며 청각적으로 선전하는 광고에 대하여 신중하게 반응하게 하고, 쓸모가 없는 것을 강박적으로 소비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도덕적인 무장을 갖출 수 있도록 하여 우리 인간이 자유롭게 되도록 한다.
여기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금욕적인 생활양식을 통하여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보호하고 이웃과의 관계를 개선시키는데 모범이 되어야 한다. 교회에는 이미 예전부터 의식적으로 물질을 포기하였던 많은 모범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으며, 그들은 우리에게 그러한 생활을 위하여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 교회는 교세를 시위하기 위한 큰 건물이 그리스도인 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 얼마나 강하게 복음의 정신을 전파하였는가 하는 것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며, 수치에 연연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가톨릭 교회에서 세례를 받는가 하는 것에만 온통 신경을 쏟아 실지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의 구원을 실감하는가 하는 문제는 멀리 뒷전에 제쳐놓고 있지는 않는가? 그리고 혹시 교회 안에 있는 우리들은 여느 사람들과 같이 물질적인 안락함에서 하느님의 구원을 느끼고 있지는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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