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들어 한국사회는 세 차례의 전쟁을 경험했지만, 서구사회들처럼 「양심적 병역거부(conscientious objection)」의 문제로 홍역을 앓아본 적이 없다. 그러니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제도적 장치도 당연히 없다. 양심적 병역거부는 「국민 개별제」를 실행하고 있는 사회에서 사회적 쟁점으로 부각된다.
한국은 건국 직후 근대적인 징병제가 채택되면서부터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가 대두됐다. 최근에는 이 문제가 주로 「여호와의 증인」신자들과 관련되어 있지만, 징병제 시작 당시에는 안식교 혹은 재림교회로 약칭되는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신자들의 문제였다. 「비무장 전투원 군복무의 입장」(noncombatantcy)」으로 요약되는 재림교회의 교리는 병역의무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 단순한 집총(執銃)거부로, 총검 군사훈련과 전투 의무 면제의 권리 즉 「비무장 요원으로 군복무를 할 권리」를 추구해왔다.
여호와의 증인은 「국가의 권위를 존중한다는 뜻에서」입영통지서에 응하기는 하지만 군복무 자체를 거부하는 더 포괄적인 입장으로서, 처음부터 「대체복무의 권리」를 요구해왔다. 지금까지 이런 신념 때문에 처벌받는 이들이 재림교회의 경우 95명, 여호와의 증인들은 1만명이 넘는다.
작년 2월 초 주간지인 「한겨레21」이 『차마 총을 들 수가 없어요』라는 기사를 내보낸 이후, 1년도 못되어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는 범사회적 쟁점으로 공론화됐다. 이런 가운데 작년 12월 한 불교 신자가 처음으로 병역거부를 공개선언했고, 지난달에는 두 명이 「반전(反戰)과 평화에 대한 신념」을 내세우면서 병역거부를 선언했다.
개신교 목사와 불교 승려 중에 신앙에 따른 병역거부로 실형을 산 이들이 있음이 뒤늦게 밝혀지기도 했다. 필자 역시 군종장교 훈련과정에서 춘천교구의 한 신부가 사실상 집총을 거부하여 임관대상에서 제외되고 마산교구의 다른 신부는 그 직전까지 갔던 일을 직접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이런 상황을 바라보는 기성 종교들의 반응은 매우 조심스럽고 착잡한 게 현실이다. 이 문제가 「이단시비」에 연루되곤 했던 소규모 교파들과 주로 관련되고, 전쟁·군대 등과 관련된 교리상의 차이까지 겹쳐있기 때문이다.
특히 개신교 보수교단들의 연합체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대체복무 입법 움직임에 대해 강력한 반대세력 중 하나이다. 개신교의 진보적 목소리를 대변해왔던 한국기독교회협의회는 설문조사와 토론회를 한번씩 진행했을 뿐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겠다는 뜻을 표명한 지 1년이 넘도록 침묵하고 있다. 교단 차원의 입장 표명이 없기늰 불교와 천주교도 마찬가지이다. 정의평화위원회와 같은 공식조직은 물론이고, 임의단체이긴 하나 천주교인권위원회조차 신중하기 그지 없는 입장이다.
그러나 우리 교회가 재림교회나 여호와의 증인의 교리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리든, 병역의무와 전쟁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든, 이 문제들과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는 별개로 접근되어야 한다. 한국교회는 1950년 군종제도가 창설될 때부터 참여해왔고, 지금도 「한국사제양성지침」은 신학생들의 군복무를 「사회체험」(Moratorium)의 일환으로 간주한다. 1967년 바오로 6세는 「민족들의 발전」에서 『어떤 국가에서는 「병역」의무를 「사회·봉사」 또는 더 짧게 표현해서 「봉사」로 부분적으로나마 대체하고 있음을 알고 대단히 기쁘게 생각한다』(74항)는 견해를 피력했다. 군복무를 의무로 부과하는 것과 대체복무를 바람직한 제도로 인정하는 것은 전혀 모순되지 않는 것이다.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는 소수자의 인권, 양심의 자유, 나아가 종교적 소수파의 자유는 인정하지 않으면서 거대 종교들의 자유만 인정한다면, 그 사회의 종교자유는 기형적이거나 위태로운 것일 수밖에 없다.
종교적 소수파를 겨냥한 규제장치들은 언제든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우리 몸에 깊은 상처를 입힐 수 있다. 서구사회의 거대 종교들이 오히려 앞장서 소수파 종교들의 권리를 옹호하고 나서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더욱이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는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에서 종교의 자유에 대한 가장 큰 장애물 중의 하나, 즉 「종교의 자유에 대한 국가안보의 우위성」이라는 정책 기조의 전환을 의미할 수도 있으므로 매우 중요하다. 또 대체복무권이 입법화된다면, 앞으로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판정 등 미묘하고 복합적인 수많은 난제들과 부딪치는 과정에서 종교나 양심의 여역에 관한 국가의 접근방식은 전례 없이 신중해지고 세련되어질 것이다. 양심적 병여거부 문제는 종교 및 양심의 자유를 대하는 한국사회의 인식 수준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킬 기회와 도전 모두를 제공하고 있다.
강인철 교수님은 현재 한신대학교 종교문화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사단법인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장으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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