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의미를 추구하는 병’이 있다. 스스로 의미 있다고 여기는 일에는 밤낮을 가리지 않지만, 의미를 느낄 수 없는 일은 손가락 하나도 까닥하지 않으려 한다. 의미 부여가 되지 않아도 내가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될 일은 하지만, 나 홀로 불편을 느끼거나 나에 대한 평판에 신경 쓰지 않기만 하면 되는 일은 잘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때 되면 하는 인사 같은 건, 좀 무례하다는 말을 듣더라도 거의 하지 않는다.
1월 1일이나 12월 18일이나 내게는 꼭 같이 소중한 시간이니, 어느 날이 더 특별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 흔한 문자 메시지도 전화 안부도 하지 않으며, 카드도 보내지 않는다. 인사하러 다니는 일은 더더욱 하지 않는다. 그런 일에까지 에너지를 쏟고 싶지 않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무례함이 싫지만, 이러다보니 나더러 예의 바르다고 할 사람도 거의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지난 설에는 부서원들이 맛있는 떡을 선물해 연휴 동안 호식했다. 그리고 설날 당일엔 아무도 회사에 오지 않으리라는 가정 하에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출판사에서 교정을 보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회사 입구의 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복장 불량이었지만 기다리게 할 수 없어 급히 나가 문을 열었다. 그는 만두 넣은 떡국을 보온병에 담아 설 인사를 왔다. 이미 아침을 먹은 터라 더 먹을 수 없어 점심 때 열었더니 ‘국’이 아니라 ‘죽’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맛있는 떡국은 전에 먹어본 적이 없었다.
따스한 ‘정’을 표현하는 방법이 바로 ‘인사’인 것을, 건방지게 무의미하다고 단정하고 외면해온 자신이 부끄러웠다. 앞으로도 내 행동이 정반대로 바뀌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지나치게 의미를 추구해서’라는 포장만은 하지 않으리라. 적어도 겸허한 마음이라도 가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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