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항쟁이 그렇게 진압되었는가 싶던 80년 7월 8일 밤 11시, 나는 인천의 송림동성당 골목길을 내려오며 야학수업을 마친 학생들과 잘 가라는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어둠 속에서 두 명의 사나이가 나타나 대기하고 있던 검은 승용차에 나를 밀어 넣었다. 무슨 짓이냐는 고함 소리에 『조사할 게 있으니 잠깐 갑시다』라는 한 마디를 내뱉고 그들은 나의 눈을 가렸다. 그렇게 불법 연행되어 간 곳이 수원경찰서였고 그제서야 나는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거기에는 인천에 사는 후배가 나보다 먼저 잡혀 와 있었고 서울대 농대에 다니던 그의 친구가 유인물을 등사해 뿌렸다는 이유로 구속 영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유인물의 최초의 출처를 캐내는 것과 그 내용을 누구누구에게 발설하고 배포하였는가가 심문의 초점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날 그들이 우리 집을 수색해 찾아 온 녹음 테이프였다. 광주에서 올라 온 처참한 참극의 생생한 육성 증언, 그것은 유인물에 비하면 핵폭탄과도 같은 물증이었다. 나는 당연히 모든 것을 어느 신부님으로부터 받았다는 거짓반 사실반의 진술을 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그리고 마침내 압수된 테이프를 바꿔치기하였다.
화장실에 쭈그리고 앉아 길고 긴 테이프 리본을 풀어내면서 그토록 절박하게 하느님을 부른 일이 그때 이후 나의 삶엔 아직 없다.
17년 전, 살벌한 계엄 하의 경찰서에서 일어난 기적같은 이야기다. 그리고 지금 전두환 노태우는 구속되었고, 5·18은 국가 기념일로 지정되었다. 5·18이 되면 광주 순례를 다녀오는 것으로 마음의 위안을 삼으면서 우리는 그렇게 광주를 정리해 가고 있다. 그러나 80년 당시의 노동야학 학생들은 아직도 해고의 불안에 떨며 제조업 노동자로 일하고 있고, 그때 구속되었던 후배는 줄곧 노동운동을 하다가 지금은 디스크에 걸려 누워 있다. 누워서 그는 이렇게 호소한다. 광주는 단지 기념해야 할 과거가 아니라 오늘 재현해야 할 민중항쟁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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