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런던에서 배달된 작은 소포를 하나 받았다.
무얼까 뜯어 보니 그 속에는 볼펜 하나가 달랑 들어 있었다.
그것은 내가 지난해 영국을 방문했을 때 그곳 영어 교사였던 클레어 에머리양의 집에 놓고 온 천 원짜리 한국제 볼펜이었다. 그 순간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런 사람들이 사는 나라, 영국이 과연 볼품없는 늙은 사자의 모습을 극복하고 새롭게 청춘을 맞이하여 유럽의 강국으로 변모되어 가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이번 총선에서 그러한 변화가 극명하게 드러났다.
토니 블레어가 이끄는 영국 노동당은 18년 장기 집권의 보수 여당을 압도적으로 누르고 무려 70%에 이르는 의석을 차지한 후 웨스트민스터에 당당히 입성하였다.
또한 이번에 당선된 의원 중에는 여성의원이 1백20명이나 되었으며, 새롭게 조각된 각료 중에는 시각장애자인 교육부 장관이 포함되었다. 블레어의 부인인 셰리부스는 퍼스트 레이디의 역할 이전에 자신의 직업이었던 변호사 업무를 계속하겠다는 선언을 하여 매스컴의 주목을 받았다.
에머리양에게 답장을 쓰려 했던 나는 망연했다.
그녀가 아무리 나를 통해 한국을 이해한다고 해도, 각종 정경유착의 비리로 대통령 아들이 구속되고 불법 선거자금이 폭로되어 대통령의 퇴진이 거론되는 정치적 상황과, 북한 동포들의 굶주림 앞에 옥수수 한 톨도 내줄 수 없다는 정부의 냉전논리가 연일 영국 BBC 방송을 타고 흐르는데, 그들에게 무엇으로 한국도 영국처럼 도덕적이고 건강한 사회임을 강변할 수 있을까.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12월 이후, 37년간 계속된 여당의 장기 집권을 우리도 이번에는 바꿔 냈다는 소식을 자랑스럽게 전하면서 그것으로 에머리에게 볼펜을 돌려 받은 감사의 인사를 대신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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