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5월의 마지막 날 성 라자로 마을에서는 아주 특별한 행사가 있었다. 사제들을 공경하고 사랑하는 많은 교우들의 정성이 결실을 맺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사제 마을의 준공 및 축성 모임이 그것이다.
기쁜 날 이왕이면 날씨도 좋았으면 하는 우리들의 은근한 바램과는 달리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벌써 며칠째 계속되는 궂은 날씨였지만 좀 야속한 생각이 들었다. 축하하러 와 주실 여러 하객들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이경재 신부님을 위해서였다. 신부님이 그 아름다운 경내의 싱그러운 녹음과 빛나는 햇볕 아래서 마음껏 환하게 웃으시며, 조금은 자랑스러워 하시며 축하와 치하의 인사를 받으셨으면 싶었다. 앞서 교우들의 정성의 결실이라고 말했지만, 실은 은퇴한 사제들을 위한 마을의 구상부터 그것이 있어야 되겠다는 확신이 서기까지 각계 각층의 인사들로부터 구한 숱한 자문, 드디어 그것이 당신이 해야 할 일이라는 소명감이 생기고부터 보여 주신 놀라운 추진력은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이경재 신부님 개인의 탁월한 능력이었다. 신부님은 물론 주님이 뒤에서 팍팍 밀어 주시고 신자들이 열심히 기도해 준 덕이라고 겸손해 하시겠지만. 걱정하던 비는 오후부터 들기 시작해 식이 시작되는 두 시경에 아주 그쳤다. 그러나 다시 우득우득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이경재 신부님이 그간의 경과 보고를 하시는 시간에는 폭우로 변했다. 그동안을 못 참고 비를 내리실 게 뭐람, 잠깐 원망스럽더니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가라앉으면서 잔잔한 기쁨을 느꼈다. 사제마을의 전경은 폭우를 통해 바라보아도 주위의 자연과 안정된 조화를 이뤄 아름답고도 평화로워 보였다. 자주 와 보지 못하여 공사의 진척 상황에 대하여 잘 모르고 있던 나 같은 사람에게는 그 건물들이 갑자기 솟아난 것처럼 환상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버섯도 아니고 견고한 건물이 별안간 솟아날 리가 없었다.
최초의 건립추진위원회를 가진 지도 삼 년 가까이나 된다. 그동안에 이 험한 산 위에다 주거 환경에 필요한 제반 기반공사를 끝마치고 건물이 서기까지 얼마나 어려움이 많았으리라는 건 조그만 집의 수리공사라도 한 번 해 본 사람은 짐작하고도 남는 일이다. 단 한두 시간의 행사 동안도 비가 올지 해가 날지 흐릴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게 우리네 인간이다. 만일 하늘이 아침부터 좋은 날씨를 허락하셨다면 조금도 좋은 줄 모르고 당연하게 받아들였겠지만, 비가 오니까 원망하는 마음이 가득해진다. 단 한 시간 동안에도 불가항력의 어려움은 얼마든지 생겨날 수 있다. 한두 시간 안에도 난관은 있거늘 신부님이 이 험한 지형에다 안정된 마을을 이루기까지의 몇 해 동안 어찌 시련이 한두 번뿐이었는가. 골백 번도 넘었으리라. 하늘은 그저 철 없이 좋아하고만 있는 우리에게 넌지시 그것을 일러 주려고 폭우를 내리셨음이 아닐까?
우리 모두가 아는 시련만 해도 신부님의 뜻하지 않은 어려운 병환을 들 수가 있다. 그 말씀을 처음 들었을 때 신부님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씀했지만 나는 속으로 사제마을은 백지화할 수밖에 없을 것처럼 느끼고 있었다. 어디 그만한 재원이 적립돼 있는 것도 아니고 라자로 마을처럼 후원회를 통한 모금에 의존해야 하는 사업인데 그건 신부님 아니면 안 되는 일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목돈을 내 놓는 독지가께서도 여러분 계셨지만 사제마을에 입주한 신부님들이 근심 없이 평화롭고 품위 있게 사시기 위해서는 역시 작은 정성을 기쁘게 보태는 후원회원 층이 광범위하고 튼실해야 한다. 신부님 아니고서 누가 그렇게 큰 성당 작은 성당 가리지 않고 들며 그렇게 감동적인 강론으로 후원회원을 늘려갈 수 있을는지, 그리고 그 일은 건강이 뒷받침하지 않고는 어려운 일인데 이제부터 어려운 투병 생활로 들어가야 하는 신부님한테 그런 짐을 지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신부님은 아직 한 번도 밖으로 병색을 나타내신 바 없이 그간 27개 본당을 방문하셔서 2만8천4백여 명의 후원회원을 모집하셨고 1999년까지 5만 명의 회원을 모집할 계획을 세워 놓고 계신다. 또한 지금까지 마련한 은퇴 사제를 위한 5채의 단독 주택과 1백35평의 성당, 식당 겸 휴게실 2채 1백 평 외에도 잠시 휴양이 필요한 사제나 방문 중인 외국인 사제를 위한 집과 체력 단련장도 말끔히 수리를 끝마치셨다. 그런 일을 하시느라 몸을 돌보지 않으시는 동안 암세포도 기가 죽었는지 더 이상 발견되지 않는다는 반가운 소식을 주치의로부터 들으셨다고 한다.
사제마을로 올라가는 길목을 지켜 주는「영원한 사제이신 예수님상」(최봉자 레지나 수녀 작)을 제막할 때 비가 거짓말처럼 걷혔다. 그리고 인자하시고 약간은 장난꾸러기 같은 예수님상이 드러났다. 예수님은 내 마음 알지? 나도 너희들 마음 다 안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굽어 보고 있었다.
둘러본 사제마을의 단독 주택은 정말이지 살고 싶은 집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아름답되 주위의 자연 환경에서 튀지 않고 안은 사치롭지 않되 견고하고 기능적이었다. 혹시 청빈이 몸에 밴 은퇴 사제님들이 너무 넘친다고 생각하시면 어쩌나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건립 취지에도 나와 있듯이「어디까지나 이곳의 주인은 나환자들이고 우리 사제들은 이분들의 귀한 세입자이자 동반자이다」라고 밝혀 놓고 있다. 평생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으신 사제들이 말년에 좀 좋은 집 좋은 환경에 세 들어 노후의 평화를 누린들 누가 뭐라겠는가. 신자들은 노사제들이 귀찮아 하시지 않을 만큼만 자주 방문하여 좋은 말씀도 듣고 재롱도 부릴 수 있기를,
봉사자들은 어버이를 섬기듯 수발 들 수 있기를 학수고대 기다리고 있다.
사제 마을을 둘러보고 내려 오는데 비에 씻긴 나무들이 참으로 싱싱하고 아름다웠다. 울창한 숲들이 뿜어 내는 싱그러운 생명력을 호흡하려고 공해에 찌든 온 몸의 세포들이 활발하게 깨어나는 것 같은 기쁨을 맛 보았다. 숲길을 걷는 것처럼 좋은 건강법은 없다고 한다. 사제마을은 은퇴한 사제들한테 뿐 아니라 일생 열심히 산 보통 사람들도 늙으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꼭 저만큼만 살고 싶은 이상향으로 자리 잡아 갈 것을 믿고 열심히 기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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