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한 번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운전을 한 적이 있다. 유학을 하는 동안 거주했던 지역이 동부지역, 워싱턴에서 아래로 3시간가량 되는 거리였고, 거기서 뉴욕까지 거슬러 올라가려니 족히 10시간은 운전을 해야 되는 거리였다. 워낙 장시간의 운전이었지만, 필자는 아내를 아끼는 마음에서 굳이 운전대를 넘기지 않고 그 먼 거리를 혼자 고집스럽게, 고단함을 감수했다.
그런데 혼자서 힘든 일을 도맡았다는 뿌듯함에 굳어진 허리를 펴고 시동을 끄는 순간, 아내의 한 마디로 10시간 동안 공들여 쌓은 내 탑은 송두리째 무너져 내렸다. 아내 왈, “당신이 택시 기사야?” 아이들은 차만 타면 잠을 잔다. 일종의 차멀미라고 하는데, 때로는 야속할 정도로 길게 누워서 아주 늘어지게 잔다. 휴게소에서 밥 먹을 때는 귀신같이 일어나서 잔뜩 먹고 나선 차만 가면 또 잔다. 아이들은 자는데, 말 한마디 없이, 무뚝뚝한 택시 기사처럼 10시간을 달려온 내게 대한 촌철살인의 한 방이다.
필자는 사실 항상 아내에게서 배우는 것이 많다. 아니, 함께한지 이제 20년 남짓 가까워 오지만 그간에 터득한 삶의 지혜는 모두 아내에게서 온 것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진 않다. 말이나 행동으로나 소통에는 매우 약한 내게, 때로는 과한 듯 보이는 커뮤니케이션의 강요(?) 역시 부부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말과 삶의 매우 “구체적”인 소통임을 일러준 큰 깨달음이었다. 물론 때로는 불감당인 경우도 있긴 하지만, 깊이 반성하면 그것도 역시 내 탓인 경우가 많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소통이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남녀의 생물학적인 차이나 정서적, 심리적 차이를 모두 고려하고라도 소통이 구체성을 띠어야 한다는 것은 사실 맞는 듯하다. 몇 가지 이유로 아내와 아이들을 미국에 두고 온지라 물리적이고 지정학적인 삶의 동반은 현재 불가능하다.
다만, 발달한 인터넷 덕분에 매일 두어 시간씩 화상통화를 하게 되는데, 모든 것을 뭉뚱그려서, 최대한 적고 짧게 말하는 필자는 아내의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식의 대화법을 수용하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면서 또 한 가지를 배우고 있다.
화상통화를 하는 동안 책상과 부엌을 오가는 아내의 동선을 확인하면서, 아내가 주일미사 오가는 길에 보고 듣고 나눈 모든 사소하고 자잘한 말과 행동들에 대해 소통하면서, 심지어 지금 먹고 있는 반찬의 가짓수와 남은 양에 대해서까지 소통하면서, 필자는 아내의 지혜로움에 속으로 감탄했다. 화상을 낯설어하는 내게 아내는 말했다. “벌써 할 말이 그리 없으면, 점점 더 할 말이 없어질거야.”
물론 말이 적다고 소통의 질과 격이 떨어진다고 한마디로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선문답을 나누는 도통한 고승이 아니다. 전폭적이고 인격적인 소통을 이루고, 상호간 삶의 공감대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뭉뚱그린 대화와 나눔보다는 생동감이 넘치는 구체적인 소통이 보다 효과적이다. 아내가 필자보다 더 넓고 깊게 아이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서로의 삶에 깊숙이 개입돼 있음을 보면, 이런 추측은 분명히 맞는 것처럼 보인다.
신앙생활, 그리고 그 가장 중요한 요소인 기도 생활에 있어서도 이러한 구체성은 매우 큰 힘을 발휘할 듯하다. 주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내 가장 내밀한 곳까지, 나조차도 알지 못하는 나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그분은 알고 계심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미사 때나, 주님 앞에서 무릎 꿇고 기도할 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넋 놓고 있지는 않은지? 내 생활 하나하나 낱낱이 고하면서 그 하나하나에 당신의 응답이, 대꾸가 있지는 않은지 살피는 것, 효과적인 기도가 아닐까? 침묵 속에서 당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도 좋겠지만, 영적인 수다스러움 역시 인간적인 면에서는 매력적이다. 그런데, 경험상, 그게 그리 쉽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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