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덕 실천에 중점을 두고 있는 대표적인 국제 평신도 사도직 단체인 성 빈첸시오아 바오로회의 설립자 프레드릭 오자남이 마침내 까다롭고 오랜 절차를 거쳐 복자품에 올랐다.
지난 8월 22일 프랑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주례로 거행된 시복식을 통해 복자위에 오른 프레드릭 오자남은 20세 젊은 나이에 빈첸시오회를 설립한 후 41세로 짧은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신앙 진리를 옹호하고 가난한 이들을 직접 방문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던 신앙인의 귀감이었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야고보 2,14). 라는 야고보 사도의 준엄한 질책은 프레드릭 오자남에게는 예외였다.
프레드릭 오자남은 『가난한 사람들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도록 보내주신 전령』이라 여기며 그들을 누구보다 존경하며 사랑했다. 평생을 가난한 사람들의 겸손한 종이 되어 그들 가운데 뛰어든 프레드릭의 삶을 살펴보는 것은 성인되는 것이 삶의 목표인 신앙인으로서 당연한 일일 것이다.
먼저 프레드릭은 20세의 젊은 대학생 신분으로 성 빈첸시오회를 설립했다는 사실이다. 낡은 이데올로기를 따르며 폭력 시위를 일삼는 지금의 우리나라 대학사회에서 가톨릭 대학은 과연 어떤 일을 해야 할 것인지를 우리 모두에게 가르쳐 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사제와 수녀들의 활동으로 우리를 설득시키려 하지 마라. 너와 네 동료들이 빈민들을 위해 무엇을 했느냐』는 반교회주의자들의 공격은 오늘도 우리 교회에 가해지는 질책은 아닌지 다같이 반성해 볼 일이다. 1833년에 가해졌던 바로 이 같은 공격에 자극 받아 즉각적으로 조직적인 빈민 구제활동에 나섰던 소르본느대학의 프레드릭과 동료 가톨릭 학생들의 결단은 우리 모두 되새겨 봐야 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우리는 프레드릭이 평생 대학 교수이자 변호사, 문필가로서 교회와 복음의 진리를 옹호하는 데 앞장서고 가난한 사람들을 직접 방문할 수 있었던 저력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생각해 봐야 한다. 그것은 바로 프레드릭이 어릴 때부터 의사로서 가난한 환자들에게 자선 진료를 하고 늙고 병든 이를 찾아가 즐겨 간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범을 보고 자랐던 결과라는 사실은 우리 모두 본받아야 될 큰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