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8일 아침 일찍 일어나 설레이면서도 바쁜 마음으로 성지순례에 필요한 짐을 챙기고, 어른들의 전송을 받으며 성지순례의 길을 떠났다. 오랜만에 공부의 짐을 벗어버리고 친구들과 긴 여행을 하는 짜릿한 기분은 홀가분하고, 성지순례라는 본래의 취지까지 잠시 잊어버리기에 충분하였다.
경남 삼랑진 오순절 평화의 마을이라는 곳에 도착했을 때는 낯선 친구들의 가지각색의 사투리가 어색했지만 한편으로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먹했던 친구들과의 사이는 어느새 긴장이 풀어지고 하느님 안에서 한 형제자매임을 느끼며 금새 친해질 수 있었다.
이튿날, 드디어 첫 도보순례가 시작되었다. 나는 자신이 만만하였고 컨디션 조절도 잘 되었으며, 여학생들의 눈길 또한 그윽하여 기분도 매우 좋았다. 나는 마음을 굳게 다잡고 어머니께서 챙겨주신 오이며 초콜릿 등을 손쉽게 꺼낼 수 있도록 나름대로 철저히 준비했다.
마침내 순례단의 한 구성원으로서 자랑스럽게 길을 나섰다. 그러나 순례를 너무 우습게 보았던 나머지 평지임에도 그것마저 힘에 겨웠다. 무덥고 갈증만 더해가는 순례의 길은 걸어도 걸어도 끝이 보이질 않았다. 더구나 경사가 급한 길을 내려가서 다시 언덕을 오르던 과정이 몇 번이었던가? 땀으로 흠뻑 젖은 우리들의 모습은 피난민 아니, 거지떼를 방불케 하였다.
어린 동생들의 모습은 너무도 처량해 보였고, 여자 아이들이 힘들어하는 모습은 안타까워 차마 볼 수 없었다. 그 중에는 꾀를 부리는 귀여운 친구들의 모습이 재미도 있었지만, 힘겨워하는 친구들의 짐을 들어주고 용기도 주며 부축도 해 주는 친구들의 모습은 정말 아름답고 흐뭇한 광경이었다.
순례가 계속되는 동안 우리는 김범우 묘소를 비롯하여 김 아가다 묘소, 죽림굴을 지나면서 묵상의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3일째도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끝까지 순례에 동참하였고 모두가 잘 참아냈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캠프화이어 시간은 참가자 전원이 하나가 되어 더욱 가까워 지는 기회가 됐다. 공부는 언제 하고 춤을 배웠는지, 너무나 잘 추고 즐겁게 노는 그들의 모습이 놀라웠다. 서로가 서로를 쳐다보고 「놀랬다」는 말을 하며 격렬한 춤솜씨를 보여준 친구들과, 귀여운 동생들의 시원한 몸짓은 어렵고 보람된 순례 후의 뒷풀이라서 더욱 즐거웠다.
지금까지 힘든 순례의 길을 끝까지 참여해 준 동생들과 친구들이 고맙다. 다음에도 이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뿐만 아니라 그들도 적극 참여할 것이라 믿으며, 잠시 순교정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순교의 정신은 무엇일까? 그 옛날 순교자들보다 우리는 훨씬 더 좋은 환경에 살고 있지 않은가? 각자 묵상하고 헐벗고 굶주리며 온갖 박해까지 받으면서 지켜온 신앙을 소중히 여기고 지키는 자세가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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