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세기 말 이 땅에 신앙자유가 선포된 후, 60년대 초반 우리나라 최초로 천주교 신자가 내각 수반이 되었으나 군홧발에 짓밟히는 비운을 맛보아야 했다.
그러나 이제 36년 만에 우리는 순교자 시대 때 학대당하던 소위 ‘천주학쟁이’ 국가수반 후보자들을 다시 갖게 되었다. 오는 12월에 있을 대통령 선거의 여당과 제 1야당의 두 후보가 모두 천주교인이라는 사실은 반갑고, 경사스럽고 은혜로운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천주교 신자가 전 국민의 7.5%에 불과하지만 국사를 책임지고 이끌어 나갈 국가수반 후보자가 이 가운데서 선출된다는 것은 여간 경이로운 일이 아니다. 전 세계 가톨릭신자 수가 10억에 이르지만 천주교 신자가 대통령이나 내각 수반으로 있는 나라는 2백여 국가 중에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다. 아시아의 유일한 천주교 국가라는 필리핀만 보더라도 전 국민의 85%가 신자지만 대통령은 개신교에서 나왔다.
또 다른 측면에서, 유력 정당의 두 국가수반 후보자들이 천주교인이라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우리의 신앙과 삶을 되돌아보고 새롭게 각성하도록 촉구하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과연 천주교 신자로서 우리는 얼마나 사회와 이웃에 대해 빛과 소금과 누룩의 역할을 하고 있는가? 순교 선열들이 어렵게 물려준 신앙유산을 일상에서 얼마나 증거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이번 선거는 여당과 제 1야당 두 후보가 모두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 때문에 지난 여느 선거 때와는 달리 특별히 심려스럽고 세인의 관심을 의식하게 되는 것은 지나친 기우일까?
앞으로 선출될 국가수반은 대희년이며 대전환기인 2천 년을 맞이하여, 21세기를 열어나갈 중책을 맡게 될 것이다. 또한 그는 민족의 오랜 숙원인 한반도 평화통일의 기초 반석을 놓아야 할 책무를 간직할 수반이다. 바로 이 같은 중요한 시점에 특별히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기도와 희생으로 주님의 더 큰 은총을 간청해야 하지 않을까? 예수님께서도 12사도를 뽑으실 때에 산에서 홀로 밤을 새우며 기도하셨다(루가 6, 12~13). 우리도 이 땅에 다윗의 신덕과 솔로몬의 지혜를 비롯하여,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풍성한 은총이 숱한 역경과 시련을 극복해 왔으며 이제 또 새로운 과도기를 맞이한 우리 민족과 우리나라를 위해 주님께 간구해야 하겠다.
이와 함께 연말의 선거도 보다 공정하게 엄중히 진행될 수 있도록 지향을 갖고 기도하며, 그에 맞갖은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하겠다.
예컨대 어느 정당도 기업에 선거자금을 요구하지 않고 기업도 정당에 각종 이권 청탁을 겨냥한 자금줄을 만들지 않아야 될 것이다. 특히 유권자들도 검은 봉투나 식사 환대 등의 유혹을 거부하여 역대 선거 때마다 차후에 야기되었던 선거무효 소송이 이번 선거부터는 청산되어야 할 것이다. 더욱이 금권 선거의 경우, 그 엄청난 비용 지출은 물가 상승을 자극하여 국가경제를 갉아먹고 결국 서민들의 가계부에 붉은 숫자만 늘린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야말로 선거는 금력의 대결이 아니라 희망을 제시하는 실현 가능성 있는 정책 대결의 장이 되어야 하겠다.
우리는 얼마나 복음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는지 깊이 성찰하고, 참된 것과 고상한 것과 옳은 것(필립 4, 8)을 추구하며, 그리스도의 향기(2 고린 2, 15)를 이웃에 선사하는 삶이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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