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성당의 빈방을 빌려서 피정을 했다. 각오는 했지만,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았다. 별수 없이 차가운 물에 손을 담그니 손이 얼어붙는 것 같고, 머리를 감으니 머리카락 하나하나가 비수가 되어 찌르는 것 같다. 그래도 고집스럽게 찬물에 머리를 감고 나니 너무나 시원하고 상쾌하다. 「따뜻한 사제관에서 머리감지 웬 궁상이냐」는 주임신부님의 질책이 즐겁게 들렸다.
그런 따뜻함을 바랐다면 서울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난방이 잘된 피정의 집을 찾았을 것이다. 찬물에 머리를 감아야 하고, 수도가 얼까봐 수도꼭지를 밤새 풀어놓아서 졸졸졸 물소리가 나야하는 이곳이 그리워서 온 것이다.
찬물에 머리를 감으면서 따뜻한 명동을 생각했다. 명동은 겨울을 겨울처럼 나지 않아도 되는 곳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겨울을 겨울처럼 느끼지 않기 위해서 수많은 것들이 필요하다. 돈이 필요하고, 사람이 필요하고, 장비가 필요하다. 시원한 여름과 따뜻한 겨울은 우리에게 쾌적한 생활환경을 보장해 줄지 몰라도 더 많은 근심과 걱정을 안겨주는 법이다.
찬물에 머리를 감으면서 요즘 신문 보도 내용이 생각났다. 「빚진 죄인」이라고 하지만, 무조건 항복문서 같은 내용의 각서에 서명을 했다는 보도! 명색이 대통령이 있고, 국회가 있는 나라에서 정부예산과 국가경제 운영과 세율과 무역규모까지 지시받는 사태가 IMF의 보호(?)하에서 일어나게 된 것이다. 국제화와 세계화라는 구호정치에 세월을 보냈던 김영삼 정부의 무능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차라리 지겹다. 어떤 지혜로 이 겨울을 이겨낼 수 있을지 궁금하다.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겨울을 겨울로 느끼지 못하면서, 겨울을 여름이라 이야기하고, 여름을 겨울이라고 착각하면서 살아왔는지 모르겠다.
찬물에 머리를 감으면서 생각한다. 이번 대림에 이 겨울을 이겨낼 수 있는 지혜를 주십사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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