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기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사람들의 목청이 조금 높아진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왜 그렇게 불친절 하는가 하는 것이 목청이 높아지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인 것 같다. 불친절을 경험하는 손쉬운 사례는 바로 전화통화가 아닌가 싶다. 과거보다는 개선됐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신자들이나 일반인들은 교회기관에 전화를 걸 때면 불친절할 것에 미리 대비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기분이 상할 것에 대비해 미리 마음다짐을 굳게 한다는 얘기다.
불친절에 대한 경험은 비단 전화통화 뿐 만이 아니다. 가끔씩 접하는 「전화 항의」나 「편지 항의」속에서 사람들은 교회기관 방문에서도 아주 자주 불친절을 경험한다고 불평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기관들은 교회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기관 단체 대부분은 물론 본당까지도 지칭하고 있음을 미리 밝혀둔다.
그렇다면 이들이 지적하는 불친절의 사례들은 과연 어떤 것들이 있을까. 먼저 전화 불친절 사례를 들어보자. 교회 불친절의 대명사처럼 떠오르는 전화 불친절은 전화를 거는 첫 순간부터 시작된다고 많은 이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전화를 받는 태도나 목소리에서부터 불친절을 예감한다는 것이다. 딱딱하고 업무적이며 다소 짜증스럽기조차 한 응답자들의 목소리를 들으면 다음 말을 이어가기조차 어려워진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이들의 주장은 상당히 일리가 있다. 교회 기관에 전화를 걸어 기분이 좋기보다는 나빴던 경험이 신자들에게는 더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로 전화를 받아야 할까. 전화를 받는 입장에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 번째로 들 수 있는 이유는 서투른 전화 때문이라 생각된다.
조금 미안한 말씀이지만 우리 신자들은 교회조직이나 구조 특성 등을 잘 알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전화를 받는 사람이 짜증스러울 만치 뭘 모르는 상태에서 전화를 거는 것이 대개의 추세라고 볼 수도 있다. 받는 사람이 보기에는 잘 알고 있어야 하는 내용을 모르거나 그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듣다보면 짜증이 동반되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일 수도 있다.
두 번째 이유로는 전화를 받는 사람들이 행복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행복하지 못한 사람은 행복하지 않은 마음이 밖으로 표출이 되게 마련이다. 만사가 불만스럽고 자기 업무에 대한 자랑스러움과 보람이 없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없는 노릇이다. 결국 나의 불만과 짜증은 다른 사람에게 투사가 되고 전화응답에는 그 같은 불만과 짜증스러움이 담겨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셋째로는 그 곳의 책임자 역시 『친절과 담을 쌓았다』고 생각하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책임자가 친절하면 딸린 식구들은 당연히 친절해진다. 한 부서의 책임자가 따뜻한 마음으로 직무에 임한다면 직원들 역시 따뜻한 마음으로 자기 일에 충실할 수가 있다. 책임자가 친절한데 부서원이 친절하지 않다면 그 직원이 「별종」이거나 책임자가 무능하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전화매너가 이 정도라면 방문의 경우 별로 다를게 없을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심한 경우 방문자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고 응대하는 경우도 상당수에 이른다는 경험은 비단 너와 나만의 일이 아닐 것이다.
역시 교회 밥을 먹으면서 불친절에 익숙한 채로 어언 20년이 지나갔다. 이번 2월로 우리 선배 한 사람은 25년, 은경축을 맞았고 나는 20년이라는 획을 그은 것이다. 평신도들에게도 은경축은 대단한 것일 텐데 송구스럽고 민망하기만 한 것은 어쩐 일인가. 그 20년을 돌아보면서 친절을 말하고는 있지만 어느덧 짜증과 불평으로 똘똘 뭉쳐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어쩌다 이리 됐을꼬.
흔히 교회기관에서 오래 일하는 사람은 세 부류로 분류된다고 한다. 무능한 사람이거나 성인군자, 아니면 아주 유능한 사람. 나는 여기서 어느 부류에 해당할까? 성인군자는 아예 못 되니 무능이거나 유능쪽일텐데 가급적이면 유능쪽이면 좋겠다는 억지생각도 해보게 된다.
자랑스럽기보다 오히려 민망하기만 한 20주년을 보내면서 아주 많은 것들을 생각해 보았다. 앞으로 몇 년을 더 채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남은 세월은 지난 20년간 내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들을 되찾는 시간으로 보내야 하겠다는 다짐도 그 생각 중에 들어있다. 행복은 누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진리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길 생각이다. 물론 보다 기쁘게 살아야 겠다는 다짐도 그 속에 포함돼 있다.
교회 종사자들이 불친절하다는 불명예를 벗기 위해서는 그들이 우선 기쁘게 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이 기쁘고 행복할 때 비로소 고객의 신발을 신을 여유가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신자들은 고객이나 다름이 없다. 물로 비신자들도 고객이다. 교회 종사자 모두가 고객의 신발을 신을 여유가 생긴다면 교회 미래는 밝을 것이 분명하다.
<취재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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