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칼럼은 1991년 7월7일부터 시작되었다. 햇수로는 4년이 지났다. 오랜 기간을 통해서 나에게 주어진 이 기회에 대해서 칼럼에서 감사할 따름이다. 나는 이 칼럼을 통해서 배우고 성장하고 살아왔다.
내가 태어난 경주는 고속전철이 들어오기도 전에 이미 만신창이 났다. 동천, 서천, 남천, 북천은 다 말라버렸고 사방팔방으로 만든 도로들은 경주의 모든 산의 기맥을 끊어버렸다. 기맥이 없는데 수맥은 말해서 무엇하랴?
TV나 기술로 인해 획일화 된 오늘날 문명세계의 시대에 아직도 고향이 있을 수 있고, 또 있다면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우리에게 돌아갈 고향이 없다. 고향상실증, 우리의 운명이다. 명절 때 보문콘도에 지내는 사람들이 아직도 고향을 그리워하는 아픈 마음이 있기라도 한가를 묻고 싶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의 고향상실증을 존재망각성, 존재이탈성, 본래적인 주거궁핍으로 표현한다. 현대인은 삐삐를 차고 다니는 유목민이 아닌가. 아파트는 존재의 처소가 아니라 망각지대이다. 우리의 고향 경주에는 어머니의 언어, 할머니의 언어, 토속어의 언어, 사투리가 있었다. 집에서 말하던 언어이다. 씨암닭 이야기, 감실 보살이야기, 날씨 이야기, 선덕여왕 이야기가 있었던 곳이 고향이다. 언어가 바로 고향인데 고향의 언어가 사라지고 사물의 언어, 광고의 언어만 가득 채운다. 저녁놀에 퍼졌던 연기와 대지에 뿌려졌던 비바람 소리가 보고 싶다. 그 고요함, 해맑음, 느림느림, 황토의 풍경속에 거주하고 싶어진다. 보리밭을 밟아보지 못했던 것도 참 오래 되었다.
생명운동은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고향은 지역감정이나 지리적인 장소가 아니다. 이 고향은 모든 중생들의 처소로써 고향 즉 대지의 힘, 황토 즉 흙이다. 강가에서 태어난 자가 늘 강과 더불어 살게 되면서 어느 세월에선가 강의 삶을 살고 있음을 추억하고, 농촌에서 태어나 늘 흙에서 살아 온 사람이, 흙의 삶을 살고 있음을 알게 되면서 언젠가 갑자기 자신이 강의 삶, 흙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강이 그리고 흙이, 고향이 자신의 삶을 사는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우리는 고향 즉 이 고향(地), 저 고향(天)의 의미를 어렴풋이 느끼게 될 것이다. 현대인은 상표로 소비로 존재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인간은 땅의 힘으로 모든 존재자들이 사는 처소로 살아가는 것이다. 달집을 지었던 우리 고향의 정월 대보름, 이제는 TV속의 달을 보며 향수에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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