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방적공장에 취업하여 고시학원에 다니게 되었다. 내가 그토록 지긋지긋하게 여기던 고교 3년의 환경조건과 똑같은 곳이었다. 공부 때문에 억지로 참아간다는 것은 괴롭고 힘들었으며, 육신의 피로가 정신을 둔하게 했고 하루하루 더욱 극단적으로 심해갔다.
오월의 태양이 창문 틈을 비집고 내 작은 책상 위를 비추고 있었다. 밤새도록 야간작업에 지친 몸은 초여름 바람이 싣고 오는 달콤한 아카시아 향기도 모른 채 책상 앞에서 팔을 베게로 삼고 곤하게 자고 있었다.
기숙사의 요란한 정오 벨소리에 정신이 없어진 나는 책들을 주섬주섬 집어들고 비틀거리며 내가 머물고 있는 호실로 들어갔다. 호실원 동료들이 눈이 뚱그레져 쳐다보았다. 『도대체 어디에 있다가 왔어?』 『얼굴은 왜 그 모양이야? 온 얼굴에 가로 세로 줄무늬가 찍혀 있어!』모두 시어머니 같이 한마디씩 했다.
기숙사 책임담당인 동장언니의 점검이 끝나자마자, 거울 앞에 가서 내 몰골을 마주 보았다. 불도깨비가 따로 없었다. 머리는 형편없이 헝클어져 있고 얼굴에 옷자국이 가득 찍혀 있었다. 자국을 없애려 씻고 또 씻었지만 원래 붉은 얼굴이 더욱 붉어 홍당무처럼 되어 버렸다.
참으로 한심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지붕위에서, 양지를 향해 누워 꿈만 꾸는 게으른 스누피 마냥, 실현성이 불가능한 내 미래를 펼치려 애쓰고 있었다. 어젯밤 작업장에서는 보다 계획성 있는 시간활용과 체계적인 방법으로 공부하리라 굳게 마음 먹었었다. 그런데 정작 책상위에서 나는 무엇을 하였는가?
어디서 「사의 찬미」노래가 들려왔다. 문득 이렇게 살 바에야 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거운 육체를 질질 끌고 다니지 않아도 되고 방황하는 영혼의 번뇌도 마지막이 될 것이 아닌가!
작업현장에서 일을 하며 골똘히 궁리하였다. 어떻게 죽는 것이 가장 쉽고 덜 고통스러울까? 어차피 죽어야 할 인생, 무능한 부모, 냉정한 세상이 나의 죽음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인생을 함부로 살지 않으려고 이렇게 애를 써왔는데 그냥 죽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기 전에 무엇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6월 중반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작업장 주임은 사표를 받아들이는 대신에 당장 다른 직장에 갈 의향이 없다면 제2공장인 반여동에 전입원이 모자라니 숫자를 좀 채워달라고 제안했다. 회사를 떠나려면 거기서 떠나라는 이 사람의 말에 비웃고 싶었지만 죽기 전에 불쌍한 인간 소원이나 들어 주자고 쾌히 승낙했다.
내 짐이라야 작은 가방 두개로 충분했다. 낯선 얼굴들과 함께 회사버스를 타고 목적지에 갔다. 아직 신설중인 공장은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어 자연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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