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3월12일 우리들의 영원하신 사제, 고 이기수(아고버)몬시뇰께서 98세의 일기로 선종하셨다.
고 이 몬시뇰께서 동명에 오신 것은 1970년 11월11일, 고성본당을 마지막으로 사목일선에서 은퇴하신 이후부터 였다. 1970년 당시만해도 동명은 대구대교구 칠곡본당에 속한 작고 보잘것없는 공소에 불과했다. 남원, 다부, 금화 3개 공소를 포함, 20여 세대 80여 명에 불과했다. 전형적인 농촌으로 대부분 경제적 빈곤과 열악한 환경이었다.
당시 73세의 고령에도 불구하시고 너무나 건강하시고 의욕적인 생활은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주셨다. 그리고 전재산을 털어 공소 주변의 땅을 사들여 새로 짓는 공소를 마무리 하시고 2세 교육을 위해 유치원도 설립하셨다. 그야말로 우리는 희망에 차 있었다.
1979년 여름, 당시 82세인 신부님께서 유치원 뒷편에 있는 감나무가 너무 커서 지붕을 해친다면서 톱을 들고 직접 나무에 올라 가지를 자르시곤 했다.
채소도 직접 재배해서 먹기도 하고 장에 내다 팔기도 할 정도로 생활은 항상 절약하고 검소하면서 마음은 늘 평화로웠으며 인자하신 할아버지로 우리 동명신자들을 친손자 같이 사랑해 주셨다.
1980년 동명공소가 준본당으로 승격되고 새로운 젊은 신부님이 부임하시자 몬시뇰께서는 하루에 버스가 3번밖에 운행하지 않는 첩첩산골인 동명면 기성동으로 이사를 가셨다. 그러나 간혹 문안인사를 드리면 한사람 한사람의 안부를 묻곤 하셨다.
언젠부터인가 우리는 몬시뇰님을 「할배신부님」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도 격이 없이 대해주시는 친근감에 우리 모두의 마음에 친할아버지로서 자리잡고 있었다.
1984년 7월26일, 동명본당에 부임해 오신 조정헌 신부께서 할배신부님께 문안드리러 갔을 때 그 자리에서 그동안 농사짓고 절약해 모은 1천만원을 주시며 사제관이 낡고 험해서 불편이 많으니 보수비용으로 사용하라고 주셨다. 그래서 조 신부님은 온갖 생각끝에 후손에게 물려줄 성전건립에 필요한 땅을 사두기로 의견일치가 되었다. 그래서 이 사실을 할배신부님께 말씀드리니 몬시뇰께서는 매우 기뻐하시며 평소 당신이 보아 둔 땅이 있다면서 그 땅을 사두면 좋겠다고 하셨다. 얼마 후 우리는 당시 2~3만원 하던 농지를 샀고 이곳에 우리의 성전을 짓는 꿈을 꾸게 되었다.
당시 교세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할배신부님은 새로운 성전을 세우기 위해서 항상 기도하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그 결과 1987년 7월5일 새 성전 착공식을 가졌으며 1988년 5월3일에 새성전을 봉헌하게 되었다. 그 이후 1994년 까지 동명면 구덕동에 사시며 늘 우리와 함께 계시었다.
1996년 3월12일 새벽 2시, 우리에게는 잊을 수 없는 그분의 시간이 정지되었다. 사목일선에서 은퇴하신 후의 26년간의 세월을 농촌에 묻혀서 손수 농사 지으시며 스스로 농민과 함께 하신 삶, 언제나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시며 무지몽매한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는 법을 온몸으로 보여주신 분!
이제 우리는 그분의 육신을 땅에 묻으며 영원한 안식과 천상의 반열에 들기를 기도 드리며 고인의 깊은 뜻을 따라 스스로 깨달아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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