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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걷느냐?』고 물었다. 『성지가 있고 순교 성현들의 숨소리를 듣기 위함』이라고 대답했다.
해외 성지순례도 아니고 흔한 관광버스를 이용하지도 않으며 재미라고는 하나도 없을 것 같은 국내 도보 성지순례에 참가한 것은 결과론이지만 하느님의 커다란 은총이었고 개인적으로 일생에 두 번 다시 얻을 수 없는 귀중한 체험이었다.
어떤 길을 선택한다는 것은 다른 모든 길을 포기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우리의 순교 성인들께서도 평안하게 한세상 살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었을 것이나 오직 천주의 진리를 증거하기 위하여 세상의 모든 것, 목숨까지도 버리는 위대한 선택을 하셨던 분들이다. 이분들은 묵상할 목적으로 참가한 도보 성지순례는 서울신학교 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님의 장엄축복으로 시작하여 부산 오륜대 순교자 기념관 성당에서 많은 형제, 자매님들의 과분한 환영속에 감사미사로 막을 내렸고 구간마다의 체험들은 실로 감동적인 한 편의 인생 드라마였다.
그 님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길에는 평소의 우리네 삶처럼 환희와 고통, 교만과 겸손, 사랑과 질투가 있어 때로는 기쁘게도 하고 때로는 분노케도 하였다.
4백30km를 한 달 동안 걷는데 아무런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개성이 특이한 사람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행렬이었음에도 한 점의 분란도 없었다는 것은 하느님의 이끄심이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었다.
처절한 오기와 수난이 할퀴고 지나간 자리에는 진리와 사랑의 씨앗을 뿌리다가 치명하신 성현들의 숨결이 서려있었으며 이 나라 방방곡곡은 성현들의 발자취로 덮여 있었다.
우리 후손들의 관심도에 따라 성지가 관리되지 못하거나 파손되는 곳도 있어 그 분들의 후손임을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하였고 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순교 성인들께서 지금도 우리 곁에 살아계심을 느낄 수 있었다.
사제들의 순교는 하느님의 몫이라 감히 언급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죽어간 수없이 많은 저 무명 순교자들의 마지막 바램을 어찌할 것이며 어린나이에 엄청난 일을 저지른(?) 이민식의 용기는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지아비와 자식을 하느님께 먼저 보내고 날마다 신ㆍ망ㆍ애 고개를 넘어 자식의 무덤가에 앉아 있다가 해질녘에 돌아가는 고 우술라 여인의 인간적인 슬픔은 어떤 것이었을까?
낙조가 더없이 아름다운 갈매못에서 하느님의 모상대로 태어난 인간이 죽임과 죽음을 연출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잔악해 질 수 있는가를 보여 주기 위한 성인들의 배려였을까?
해발 9백 미터의 깊은 동굴 속에서 추위를 견디며 생쌀로 연명했던 그들의 소망은 과연 오늘날에 이루어진 것인가?
나와 같이 평범한 사람은 영원히 풀 수 없는 화두「순교」를 묵상하면서 마음이 한없이 무거워지는 것은 순례를 통하여 철없던 마음이 조금씩이나마 순화되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리라.
충분한 기도가 없이는 순례에 참가할 수 없다. 의욕만을 가지고 참가했기에 처음엔 많은 잡념으로 괴로워하였다. 어느 구간에서는 걷는 것이 너무 재미있어 도보 순례가 나를 위한 것인 양 자만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또한 겸손도 배울 수 있었다. 신부님의 빠른 행보에 불만도 있었으나 그 속에 목자의 마음이 담겨 있음을 알게 되었고 탈진하여 낙오했을 때는 좌절감과 허탈감으로 괴로워하였으나 형제ㆍ자매님들의 기도와 사랑이 항상 나와 함께 하고 있었음을 깨닫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번 도보 성지순례를 통해 지난날의 내 모습들을 뒤돌아보고 사순절 동안의 순례기간 중에 얻게 된 많은 행복과 깨달음을 하느님의 영광으로 봉헌코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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